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토고오소]퍼졌다

-'향'의 뒷이야기




 영영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길고 긴 밤이 결국 막을 내리고 종이 달력은 찢겨져 나가 아저씨가 돌아오는 날임을 제 몸 바쳐 알려주고 있었다. 오늘 드디어 아저씨가 오는구나. 도둑질도 안 하고 청소도 안 하던 행복한 나날과 안녕을 고하는 건 적잖이 슬픈 일이지만 제 후드 주머니 속에서 놀고 있는 고급진 케이스의 담배는 하루라도 빨리 그의 손에 쥐어주고 싶었다. 무슨 반응을 보이려나. 심부름이라고는 죽어도 하기 싫어하던 네가 자진해서 사오다니 웬일이냐. 담배는 갑자기 왜 산 거냐. 아니면 담배와 상관없는, 어떻게 지냈냐는 등의 안부 인사를 물어볼지도 모르는 일인가. 에이. 아저씨가 안부를 묻기는 무슨. 보자마자 잔소리나 안 하면 다행이겠다. 오소마츠는 바람 빠진 소리로 피식 웃으며 뜯어낸 달력 쪼가리를 돌돌 구겨 휴지통에 던져 넣었다. 갑자기 또 담배 향이 그리워졌다.


 지금 한 개비를 필까. 아니면 아저씨가 피우는 체향 같은 자욱한 담배 연기를 지금처럼 하염없이 기다릴까. 인내심이 그다지 없는 성격이건만 이번만큼은 기다리는 것도 마냥 나쁘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잔잔하게 수면 위로 떠올라 오소마츠는 그냥 소파 위에 덜렁 누워버렸다. 그래. 기다리지 뭐. 시간은 발이 너무나도 느려 터져서 도대체 언제쯤 아저씨가 돌아올 시간에 멈춰서 줄지 쉬이 예측할 순 없지만. 드러누운 제 시야로 새하얀 천장이 들어온다. 이따금 아저씨와 몸을 섞을 때 숨을 헐떡이던 그 혼미한 정신 속에서도 제 눈으로 들어오던 새하얗고 깔끔한 천장. 이런. 모든 것에 아저씨가 실처럼 연결되어 있었다. 이걸 끊어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니라 오소마츠는 그리움이 점점 더해갔다.


 아저씨를 어떻게 기다리나. 시간을 가장 편하게 보내기 위해서는 잠들어 버리는 것이 가장 좋지만 혹여나 아저씨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중요한 순간을 놓친 채 곯아떨어질까 걱정되고, 무언가 다른 것을 하자니 할 만한 일이 없었다. TV는 몇 번이나 봤던 프로의 재방송. 청소는 아저씨가 돌아온다는 사실에 어젯밤 급히 마무리 한 터라 딱히 손 델 곳이 없었다. 물론 아저씨가 보면 또 어떨지 모르지만. 그래. 결론은 원점. 도대체 어쩌란 거지.


 만약의 경우지만 아저씨가 오늘 안에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해야 한다고 말했던 일이 많아지거나 차가 엄청나게 막힌다던가. 그런다면. 그럼 어쩔 수 없이 아저씨가 없는 공허함을 느끼며 뼛속까지 느껴지는 무료함과 허전함을 달래기 위해 애써 참아왔던 담배를 다시 입에 물어야겠지. 내가 피는 것보다는 난 단 한 개비라도 더 아저씨가 피는 걸 보고 싶은데. 정정하자면 보고 싶은 게 아니라 그 향기를 맡고 싶은 거겠지만.


 그 향기가 도대체 뭐라고 난 이렇게까지 집착을 하는 걸까? 세상에는 그 검기만 한 향보다 훨씬 더 매혹적인 향이 널려있는데. 스쳐지나가는 여인의 깊은 향수. 또는 이슬같이 맑은 물기를 머금은 생그러운 과일의 달콤한 향. 그런데 내가 지금 죽을 것 마냥 목을 매는 향은 한낱 아저씨의 검고 진한 담배 향기? 조금 웃기지 않아? 이 카리스마 레전드 인간국보가? 오소마츠는 물음표가 가득한 생각 끝에 헤헹, 하는 경박한 웃음소리를 달았다. 이렇게 돌아보니까 진짜 웃기긴 하네. 담배 하나 때문에 이렇게나 간절히 사람을 그리고 생각한다는 시시하고도 뻔한 사실이. 뭐 그래. 나도 몰랐던 나의 취향이 조금 특이할 수도 있는 거지 뭐! 스스로도 담배 연기를 그리워하는지 아저씨를 그리워하는 건지 확실히 분간할 수 없었지만 후자는 분명 아닐 것이라 가볍게 여겼다. 내가 늙은 토고 아저씨를 그리워 할 이유가 없잖아? 안 그래?


 아저씨를 기다리는 시간은 생각보다는 짧았지만 기다림은 너무나도 길어서 자칫 아껴왔던 담배를 한 개비 태울 뻔했다. 그 향이 얼마나 고프던지 아저씨는 모르지? 제가 모르는 새에 눈이 내린 듯 토고는 머리와 어깨에 차고 하얀 눈덩이를 조금 쌓은 채 묵직한 철문을 열었더랬다. 희미하게나마 제 머릿속에 그렸던 얼굴. 오소마츠는 반가움이 벅차오르는 얼굴로 좁은 복도를 달려 눈을 털고 있는 그의 품에 안겼다. 제 두 팔로 껴안은 한껏 껴안은 그의 마른 목은 날카로울 만치 얼어 붙어있어 녹아있던 제 피부를 냉랭하다 못해 뾰족하게 찌르고 있었지만 제 코로 풍겨오는 그의 담배향기에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또 피고 들어왔구나. 유난히 어둡던 어제 그 달밤 아래에서 우리는 같은 담배를 피우고 있었을까. 저와 어울리지 않게 몽글하게 피어나는 아련한 감상에 흠뻑 젖어있을 찰나 토고가 제 몸을 가볍게 밀어내며 말했다.


 "징그럽게 왜 이래. 무거우니까 떨어져."


 퉁명스러운 목소리와 명령조의 말투가 서늘한 복도에 잔잔히 울려 퍼진다. 진짜 돌아왔구나. 제 귀에서 한참 맴도는 낮게 깔린 목소리에 오소마츠는 실없이 헤헤 웃으며 그의 목에 단단히 걸었던 팔을 느릿하게 풀었다. 토고는 그런 저를 이상하다는 듯 흘겨보다 균일한 바둑무늬가 그려진 제 재킷을 벗어 오소마츠에게 넘겨준다. 눈이 묻어 있던 재킷은 축축하다.

오소마츠는 재킷을 뚫어져라 바라본다. 자신이 그렇게 기다리던 아저씨의 향이 가득 묻어나 있는 바둑판무늬의 구김 없이 깔끔한 재킷. 오소마츠는 흐릿한 시선으로 향에 취한 사람처럼 그 재킷에 제 얼굴을 한껏 묻었다. 은은하지만 강하게 풍겨오는 향에 구름에 떠 있는 듯 꿈을 꾸는 기분. 점점 아저씨가 돌아왔다는 현실이 제게 가까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안 들어오고 거기 서서 뭐하는 거냐?"


 꿈에 한껏 들떠있던 제게 아저씨의 불만 가득한 의문이 날아온다. 오소마츠는 빼꼼 고개를 들어 토고의 눈에 담긴 제 힘없는 모습을 바라보곤 피식 웃는다. 아니야. 뭐 묻은 것 같아서.


 토고는 한동안 보지 못했던 방을 빙 둘러보다가 아무 잔소리 없이 옷을 챙겨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오소마츠는 문이 닫히자 긴장이 풀린 듯 소파에 미끄러지듯 주저앉아 다리를 덜렁 들어 무릎을 모은다. 바둑판 재킷은 손에서 놓을 생각도 하지 않은 채 행여 놓칠세라 제 손에 꼭 붙잡고 있다. 아니. 품고 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려나. 이쯤 되니 스스로가 생각해도 병인 것 같은데. 아니면 변태거나. 이 담배 향 하나를 절대 놓지 않고 있는 집착 가득한 모습이. 어릴 적 장난감을 놓지 않던 이후로 처음 보는 이 낯선 상황이.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동안 오소마츠는 마치 수면제를 한 손 가득 삼킨 것 마냥 거대한 수마가 저를 집어 삼키듯 덮쳐버렸다. 감기는 시야 사이로 오소마츠는 제 손에 잡혀 있는 바둑판무늬가 흐릿하게 들어왔다.



 

 제 몸을 간헐적으로 흔드는 느낌에 눈을 뜨자 흐릿한 시야 사이 너머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아저씨의 모습이 보인다. 어느새 해는 까무룩 잠들어 방안에는 그득한 어둠만이 남아있다. 저를 깨운 아저씨가 불을 밝히자 오소마츠는 눈이 부신 듯 얼굴을 찌푸린 채 누운 자세 그대로 일어나질 않는다. 이내 제 귀로 아저씨의 불만 가득한 목소리가 들린다.


 "옷을 끌어안고 자면 어쩌자는 거냐. 구겨질 건 생각도 안 해?"


 오소마츠의 품에서 함께 잠들어 있던 옷을 뺏어 들어 주름을 펴기 위해 탈탈 털고는 벽 한쪽의 옷걸이에 차분하게 걸어둔다. 오소마츠는 빼앗긴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부스스한 정신으로 무거운 몸을 일으켜 멍한 시선으로 밝게 빛나는 전등을 바라본다. 토고는 제 옆에 앉아 리모컨으로 입을 다물고 있던 TV의 잠을 깨운다. 잠에서 깨어난 TV는 멍청한 시선을 하고 있는 오소마츠와 달리 재빠르게 재잘거리며 방에 쾌활한 공기를 가득 채운다. 제 귀로 들려오는 사람들의 경박한 웃음소리를 흘려듣고 있던 오소마츠는 토고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다 힘없는 두 팔로 넓디넓은 등을 꼭 끌어안는다.


 "나 안 보고 싶었어?"


 깊게 잠겨버린 목소리로 말의 파편이 울퉁불퉁하게 툭 튀어나간다. 돌아와서 내 얼굴 한 번 제대로 안 봐주고, 잘 있었냐는 말도 안 해주고. 물론 기대도 안 했지만 괜히. 오소마츠의 말에 토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답한다. 보고 싶기는 무슨. 다 큰 사내새끼 주제에 말 안 듣는 골칫덩이 없어서 조용하니 좋기만 좋았는데.


 그 말에 오소마츠는 바보처럼 헤헤 웃는다. 정말? 정말 그랬어? 나 없어서 좋았어? 난 아저씨 보고 싶어 죽는 줄 알았는데. 분명 몇 시간 전만 해도 아저씨를 보고 싶어 하는 건 절대 아닐 것이라 전면 부정했으면서 제 입은 이상한 말을 지껄이고 있다.


 "...오늘따라 왜 이래? 안 하던 짓을 하고. 다 큰 녀석이 징그럽게."


 토고가 내뱉듯 말한다. 갑자기 서운함이 제 마음으로 찾아든다. 아저씨의 차가운 말투와 행동은 너무나도 익숙한데 왜 오늘에서야 갑자기 이렇게 서러운지 모르겠다. 왜지? 아저씨 말이 언제부터 그렇게 싫었다고? 아저씨가 내뱉는 말에 언제 상처 받고 살았다고? 내가 언제부터 그렇게 나약한 감정을 가졌었나? 그의 말에 한참동안 대답도 하지 않고 우두커니 있으니 이상하게 여긴 듯 뒤를 돌아 저를 마주한 토고가 놀란 눈을 한다.


 "우냐?"


 뻔뻔하지만 살짝 누그러든 목소리. 헛, 하고 정신을 차려 마른 손등으로 제 볼에 흐르는 것을 만져보니 투명한 물방울이 제 손을 거칠게 핥고 지나갔다. 눈물이다. 뭐지. 나 왜 우는거지. 아저씨한테 면박 듣고 산 게 몇 년인데 왜 질질 울고 난리야. 오소마츠는 부지런히 눈물을 훔치며 어떻게든 멈추려 노력하지만 한 번 넘쳐버린 제 샘은 막을 수 없이 크게 터져버려 점점 더 번져가기만 한다.

눈물은 어느덧 제 눈 안 가득 고여서 멀뚱히 보고 있는 토고 아저씨마저도 흐리게 만들었다. 그만 울어. 네가 무슨 일곱 살짜리 꼬맹이도 아니고 왜 그런 말 좀 들었다고 세상 무너진 것 마냥 질질 짜는데. 그리고 아저씨 얼굴이 안 보이잖아. 그만. 그만해. 불안해서 미칠 것 같단 말이야. 제발.


 아저씨. 눈물을 닦는 손을 거두지 않고 꽉 막힌 목소리로 토고를 부른다. 선명치 않은 시야로 팔을 뻗어 그의 목을 다시 끌어안는다. 딱딱하게 굳어 있는 그의 몸과 달리 따뜻한 온기가 제 팔로 느껴진다. 지금의 아저씨는 저를 밀어내지도, 어떤 말도 하지 않는다.


 나 있잖아, 아저씨가, 돌아오지 않으면, 어떡하지, 걱정했다.


 토고의 귀에 제 불안정한 숨결과 함께 자신도 몰랐던 두려움을 털어놓는다. 처음으로 혼자 남겨진 집. 아저씨와 단 한 순간도 떨어진 적이 없던 몇 십년. 세뇌당한 인형마냥 제 몸에 걸린 실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에 밀려온 무기력감과 채울 수 없는 공허함은 자신을 벼랑으로 내몰듯 겁에 한껏 질리게 만들었다. 아저씨 어디 있어? 언제 와? 뭐하고 있어? 돌아오기는 해?


 나 버리고 간 건 아니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어둠속에서 오소마츠는 미친 듯이 소리 질렀다. 아저씨. 아저씨. 나 좀 잡아줘. 어디 있어. 나 무섭단 말이야. 존재의 유무도 확실치 않은 상황에서도 오소마츠는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목이 터져라 그를 불러댔다.


 자신이 두려움에 떨며 아저씨를 찾아다니는 동안 몸속에서 기생하던 검은 덩어리는 제 온 몸의 벽을 다 덮을 정도로 무럭무럭 뻗어나가며 제 피를 바짝 말렸다. 아저씨가 자신을 버린 게 정말이라면? 등으로 흐르는 식은땀에 제 몸이 서늘하게 식어감을 알았을 때 자신의 몸은 이미 검은 덩어리에게 잠식되었음을 깨달았다. 눈도, 입도, 제 몸도 전부 넝쿨로 꽁꽁 감아버리고. 아저씨 빨리 돌아와 줘. 날 버린 게 아니라고 해 줘. 어서 와서 담뱃불로 이것 좀 검게 태워 줘. 내가 그리던 향기를 공기 중에 퍼트리면서.


 제 숨까지 막아버리려던 순간 그리운 담배 연기가 밀폐된 공기 중으로 퍼졌다. 아저씨? 아저씨야? 소리는 막혀 나오질 않고. 갈라진 넝쿨 사이로 보이는 것은 제가 사 온 담배를 입에 물고 저를 내려다보고 있는.


 "아저씨."


 토고는 눈을 마주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키스해 줘. 작고 퇴폐적인 목소리로 오소마츠는 속삭인다. 곧 가장 차가운 입술이 제게 부드럽게 닿는다. 그리고 제가 가장 그리던 향기가 제 입안으로 가득 퍼져 나간다.


 어서 와, 아저씨. 기다리고 있었어. 너무 많이. 이제는 어디 가지 말고 내 곁에서 함께 숨 쉬고 있길 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