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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가하나]늪

無下 2018. 10. 6. 22:53

당신은 늪이었다. 온 세상을 빛나게 할 만큼 화려하고 드넓은 금빛 사람이었음에도 변함없이 검고 깊은 늪이었다. 한 번 발을 들여버리면, 손끝이라도 스치면 원래의 세상은 눈에도 담을 수 없을, 꽤나 잔인하고 욕심 많은 늪. 허나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그 환한 길에서 어떤 사람이 늪을 보고 빠지는 어리석고 멍청한 실수를 저지르겠는가, 하는. 그건 제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일 터였다. 그 사람이 비추어놓은 밝은 길에 빤히 보이는 늪에 발이 닿을 리가 없었다. 안일했다.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건너라는 말은 헛되이 존재하는 말이 아니건만.

당신이 그 세계를 구축한 이라는 사실에서 발길을 돌렸어야 했건만.

 

여섯 번째. 그리고 중개인은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나름의 인정을 담았으나 딱 선을 긋는 듯한 엄한 목소리로 제게 그리 말했다. 이리저리 서류를 뒤적이는 틈새에 하나는 그저 아무런 대답 없이 손 지문 하나 남아있지 않은 유리 테이블에 놓여 있는 익숙한 소개장에 시선을 고정한 채 제게로 떨어지는 말들을 대충 주워섬긴다. 사람들이 전부 하기 싫어하는 일을 시키려고 저와 같은 사람들을 고용하는 것인데 이리저리 빠져나간다는 평판이나 듣고 분쟁을 일으키면 어쩌냐고. 같이 일하는 사람들에게서 간간히 들려오는 볼멘소리도 꽤 한도를 넘어선 것 같다는. 시시콜콜한 잔소리. 마지막으로 그는, 이번 집에서 쫓겨나면 어떤 수를 써도 도와줄 길이 없다며 살벌한 으름장을 놓는다. 이 일대에서 가장 큰 저택에다가, 이곳을 거진 손에 쥐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의 주인이니까 여기서 눈엣가시가 되면 이 직종뿐만 아니라 다른 직종에도 발을 붙이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며. 그렇다면 여길 떠나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다고.

다른 건 모르겠지만, 그건 꽤 무서운 이야기네. 하나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중개인이 챙겨준 소개장과 그 집에 대한 사항들이 적힌 서류를 챙겨들고 길을 나선다. 이번에는 좀 잘해보라는 중개인의 외침에 가벼이 손을 들어 보이고는. 지나가는 인력거꾼을 잡아 어물어물, 아직은 익숙치 않은 저택의 주소를 말해주며 이곳으로 가달라 말한다. 무엇이 걸리기라도 하는지, 인력거꾼은 조금 다듬어지지 않는 날선 눈으로-아마도 호기심이라도 생각한다. 지금 돌아보자면-저와 손에 들린 서류를 번갈아보다 몸을 굽힌다. 하나는 망설임 없이 몸을 싣는다. 어눌하게 구름이 어두웠다.

 

꽤 한참을 걸어갔다. 돈을 응당 주고 부탁한 일임에도 인력거꾼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는 돈을 받고선 별 말 없이 저를 한 번 더 흘끗 보고는 돌아가긴 했으나. 하나는 이내 그 모든 것을 넘기고 멀리서부터 보았던, 우두커니 서 있던 거대한 저택을 보며 짧은 탄식을 내뱉는다. 중개인이 말했던 대로 저택은, 사실 이 지역을 다스리는 사람의 것이라 말해도 자연스럽게 넘어갈 것 같이 웅장했다. 그저 크기만 무식하게 컸다면 이리 놀라지도 않았을 터인데 들어서지도 않은 입구에서부터 눈에 띄는 세밀한 장식들과 잘 다듬어진 문패. 담 너머로도 조금씩 보이는 깔끔하고 고풍스러운 외곽. 그리고 어딘가 무시할 수 없는 분위기가 다소 저를 엄습한다. 서류에는 그냥, 꽤 발이 넓은 사업가라고 쓰여있었던 것 같은데. 이건 무슨. 서류를 한 번, 저택을 한 번. 그렇게 번갈아 보다 하나는 발을 옮긴다. 어차피 일하기로 한 거 여기서 구경만 하고 있어봤자 뭘 하겠나. 게다가 이 웅장한 저택의 내부는 어떤지 좀 호기심이 일기도 하고. 손가락을 뻗어, 녹 하나 슬어있지 않은 초인종을 누른다. 잠깐, 그 주변을 제대로 둘러보기도 전에 사람 하나가 나와 큰 문을 밀고 저를 본다. 마츠다씨 소개로 오신 분, 맞나요? 긴장한 기색 하나 드러내지 않고 하나는 짧게 대답하고서 소개장을 내미는 것으로 말을 대신한다. 1. 침묵으로는 긴 시간에 일꾼은 소개장을 훑어보고서 제게 들어오라 말한다. 눈이 시릴지도 모르겠다는 감각이 드는 화려한 정원을 지나, 이제껏 본 집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고풍스러운 복도를 지나는 동안 하나는 잠시 넋을 놓고서 시선을 바삐 움직이느라 정신이 없다.

여기가 하나씨가 지낼 곳입니다. 복도의 끝. 일꾼들의 숙소일 것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곳과 비교하여 뒤지지 않는, 누추한 기색 하나 없는 방을 열어보이며 그는 그리 말했다.

지금은 주인께서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하나가 짐을 방 한 켠에 놓아두는 동안 그는 설명을 늘어놓는다. 제 일에 대해서는 엄격한 분이신데다가 일꾼들과 대면하는 것을 썩 내켜하지 않는 분이니 함부로 신경을 돋우는 일은 없도록 하셨으면 합니다.

이따, 제가 다시 찾아올 때는 인사를 드리러 가는 것으로 아셨으면 합니다.”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것은 좋으나, 아무 곳이나 들어가지는 마십시오. 그는 그말을 끝으로 작게 목례를 하고선 문을 닫았고, 발걸음 소리가 점점 멀어짐에 따라 하나는 꽤 길게 숨을 내뱉었다. 어딘가 지친다. 아직 그 무엇도 시작하지 않았는데. 짐가방을 한쪽으로 밀어놓고 하나는 곱게 정돈되어 있는 이부자리에 잠시 몸을 뉘인다.

 

저도 모르게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눈을 떴음에도 암흑이 펼쳐져 있는 것이 무엇인가 싶어 몇 번 눈을 깜빡였을 때야, 지금은 밤이 찾아왔음을 알고 놀라 벌떡 일어난다. 뭐 해야 하는 일은 없는데도 반사적으로. 놀란 탓에 잠은 저 멀리로 도망가버렸고 그 널따란 방에 남은 것은 창가로 넘어오는 얕은 달줄기 하나 뿐이다.

어쩌나. 다시 잠을 찾기에는 거리가 멀고, 이곳을 막연하게 돌아다니기에는, 조금 캥기는 부분이 있는데. 아마도 이곳의 관리인 같던 사람은 아무 곳에나 들어가는 것을 빼면, 돌아다니는 것은 괜찮다고 하였으나, 모두들 제각기의 꿈으로 찾아갔을 이 시간에 발걸음을 하는 게 의심을 사지 않을 일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 같아서. 하지만 고민을 하면 할수록 눈은 더 선명하게 깜빡이고 달은 높은 고도를 향해 산등성을 오른다. 안 되겠다. 조용히, 그리고 복도만 돌아다니면 괜찮겠지. 하나는 몸을 일으켜 소리 없이 문을 여는 것부터 주의를 기울인다.

주인의 취향일까. 길게 이어지는 복도는 바깥의 정원을 곧장 볼 수 있는 창문이 짧은 간격으로 줄지어 내져 있다. 잠을 청할 수 없다는 이유로 막연하게 나와보기는 했으나, 그저 이곳에 서서 바깥 풍경을 보는 것만으로도 꽤 괜찮은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완벽한 정원이다. 꽃을 싫어하는 이까지 사랑한다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전부 살아있으며, 만개했고 눈물을 터뜨릴 것 같은. 손에 쥐고 싶은 정원. 하나는 눈에 담긴 그 풍경을 따라, 천천히 복도를 거닌다. 하긴 이런 저택을 가진 주인이라면 무엇이든 완벽해야 만족하는 유형의 사람이 아닐까. 얼굴 한 번 보지 않았으나 그런 억측을 해보곤 앞으로의 일이 얼마나 고될까도, 한 번쯤 돌아본다. 그러고 보니까 주인이라는 사람, 아까 인사하러 가야 할 거라고 그랬는데. 잊어버린 걸까, 아니면 자신이 자고 있는 걸 알고 부러 깨우지 않은 것일까. 후자라면 이미 가시가 박혔을지도 모르는 일인데. 얼굴도 성격도 괴팍한 사람이면 어쩌나. 여기서 잘리면 더 이상 갈 곳도 못 찾을 것 같은데. 어찌해도, 이번만큼은 좀 진득하게 있어 보자고, 하나는 발소리 없이 복도를 걸으며 다짐한다. 설마, 못 살만큼 힘들게 굴릴까. 이 넓은 저택에서. 사람도 많을 텐데. 이미 눈에 띄었을지도 모르지만.

하나의 발은 잠시 걷기를 멈춘다. 아직 잠이 덜 깼나. 손으로 눈을 잠시 비빈다. 달빛이 너무 찬란해서 빛을 형상으로 착각한 것인가. 제 시선의 저편에는 사람 하나가 창가에 서있는 것 같은, 그런 모습이 보여 눈을 몇 번이나 깜빡인다. 이 밤에 잠 못 드는 사람이 또 있는 걸까. 아니면 자신이 잘못 본 것일까. 하지만 사라지지 않는 모습을 보아하니 분명한 형상임을 부정할 순 없을 것 같다. 앞으로 더 나아갈까? 아니면, 발걸음을 돌려 방으로 돌아갈까? 괜한 오해를 사는 일은 삼가고 싶은데. 일말의 망설임에 발걸음이 주춤하는 사이, 그 사람은 고개를 돌려 아마도 하나를 발견한 눈치로, 오라는 듯 손짓한다. 돌아가기에는 글렀다. 스멀스멀 올라오는 긴장감을 무시하지 못한 채로 하나는 느린 걸음을 한다. 누군지 알 수 없지만, 뭔가 짐작이 가는 사람. 거리가 좁혀질수록 뚜렷해지는 얼굴은, 꽤 고단해보이고, 화려했다. 지나칠 수 없는 화려함. 그게 그의 첫인상. 찬란한 금빛부터 시작해서 사랑을 담은 장미를 베어버리면 슬프게 흘릴 핏빛의 눈동자가.

넌 무엇이냐. 달빛이 찰랑이던 금발의 남자는 제게 그리 묻는다. 어딘가 만족스럽지 못한 사람처럼 불쾌하기라도 한 듯, 표정을 가늘게 일그러트린채로. 하나는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그가 이 저택의 주인임을 스쳐지나가듯 짐작한다. 그에 따라 두 손을 포개어 모으고, 가볍게 목례를 하여 신경을 거스르지 않도록 차분히 인사를 한다. 하나라고 합니다. 오늘부터 여기에서 일하게 된 일꾼입니다. 간략하고 단순하지만 비굴하지 않고 또렷한 목소리로 제 이름을 읊조린다. 다만 여전히 풀리지 않는 그의 꿍한 표정이 마음에 거슬려 숨 아래로 내려가지 않을 뿐. 뭐야, 근데 주인이 이렇게 잘생겼다고는 얘기 안 해 줬잖아. 중개인. 폐에 숨이 걸린 것 같은 느낌이 비단, 주인의 불편한 심경 때문만은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이 땅에서 느껴보기 힘든 신선함이 씨앗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밤에 무슨 연유로 길 잃은 개마냥 저택을 쏘다니고 있는 것이지, 계집. 날카로운 목소리다. 평소 일을 하던 이도 아니고 겨우 오늘, 그것도 얼굴 한 번 비추지 않은 일꾼이 아무도 없는 저택을 돌아다니는 것이 분명 달가운 일은 아니겠지. 숨을 한 번, 당황하여 마시고 천천히 변명 아닌 변명을 또박또박 말해본다. 잠을 너무 일찍 청해 늦은 밤에 눈을 뜬 탓에, 무료한 시간이 버거워 이리 나왔습니다. 혹시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그런데. 하나는 호기심을 참지 못한다. 주인께서는 왜 이 늦은 밤에 눈을 붙이시지 못하고 이리 나와 계십니까. 혹시 잠자리가 불편하시기라도. 그의 표정은 분명 어딘가 날이 서 가려져 있는 듯 보이지만, 피로한 기색이 역력해보였으니. 눈치 빠른 하나에겐 그 점이 유독 거슬렸던 탓이다. 만약 잠을 청하는 게 불편하시다면 제가 감히 침소에 들러 조금이라도 더 쉽게 잠에 드실 수 있도록 도와드려도 괜찮겠습니까. 순전 이 늦은 밤에 돌아다니는 것으로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함이다. 미운 털이 박히었으면 진즉 빼내는 것이 후에도 좋을 것 같으니. 표정이 굳어있던 그는, . 어이없다는 듯 바람 빠지는 소리로 웃곤 내뱉듯 이야기한다. 일개 일꾼 주제에 내 침소에 발을 들이려하는 것도 가소롭건만, 무얼 도와줄 수 있는지 광대가 하는 우스꽝스러운 농담보다도 쓸데없는 말이군. 짜증이 분명한 표정에도 꽤 재미있어 보이는 장난감을 잡은 것마냥 미세하게 입꼬리를 올려 조소한다. 이런 큰 저택을 가진 주인의 성격이 퍽 좋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저 얼굴에 사람을 가벼이 무시하니 어딘가 끊어진 실타래 같은 이질적인 느낌이 든다. 하나는, 그의 말에 반박하며 조곤조곤 말한다. 저는 글을 읽을 줄 압니다. 훌륭한 주인이시라면, 문학도들의 혼이 담긴 책을 즐기실 줄도 알고 계시겠지요. 잠이 들지 않아 무료하고 괴로운 시간을 제가 바꾸어 드릴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합니다. 잡히지 않는 공기에 뚜렷하지 않던 시선을 오롯히 들어 그 붉은 눈과 마주한다. 찰나지만, 매의 눈이라고 생각했다. 배를 채울 먹이라도 발견한 건가. 하나는, 그 먹이가 자신이 아니기를 무의식적으로 간절히 바랐던 것 같다. 그가 몸을 돌려 그 긴 복도를 다시금 거닐기 시작할 때까지. 스스로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깊고 깊은 의식에서.

따라오지 않고 무얼 하느냐, 계집. 달빛이 새어들어갈 틈 없는 그 어두운 복도에서조차 숨겨지지 않는 그는 돌아보지도 않은 채로 제게 그리 말한다. 하나는 등불 같은 그를 따라 점점이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너무 깊은 어둠은 아니었지만.

 

그의 침소는 다를 바 없이 환했다. 눈을 편안히 둘 수 있는 곳이 없었다. 온갖 황금 장신구들, 값져보이는 붉은색 비단의 침대. 그가 마시다 지쳐 남겨두었을 것 같은 어두운 적색의, 유리잔에 담겨 있는 것은 아마도 술. 제 시선이 머무르도록 허락된 곳은 없는 듯했다. 그는 여유로운 걸음으로 침대에 걸어가 앉는다. 시선의 휴식처를 찾고 있는 하나에게 그는 시선으로 책이 빼곡이 꽂혀있는 나무장을 가리키며 낮게 깔린 목소리를 낸다. 글을 읽는다는 게 진실이라면 내게 가히 걸맞는 문장들을 찾아 올 수 있겠지. 기대를 채우지 못하면 어찌 될지 각오하고 내 침소에 발을 들였을 테니. 그 말을 끝으로 그는 몸을 침대에 기대어 책을 고르는 데에 열중한 하나를 구경하며 얕게 미소 짓고 있었으며.

등 뒤로 쏟아지는 시선을 가지고서 하나는 책 한 권을 뽑아낸다. 자신이 읽어본 적 있는 익숙한 제목의 책이다. 그의 마음에도 이 책이 속삭이는 이야기가 들어찰지는 모르겠으나 어차피 이야기가 끝나기 전까지는 모두 도박일 뿐이니. 이길 패와 질 패로 나뉘어져 있을 뿐이다. 하나는 숨소리를 죽이고 그의 앞에 선다. 시선이 사라지기를 바라는데.

그럼, 읽어드리겠습니다. 차분하고 또렷한 목소리가 방 안을 조금씩 채우기 시작한다. 그는 문장 한 번 끊는 일 없이 이야기를 들었으며 하나는 글자를 틀리고 싶지 않아 책에만 온전히 집중한 채로 길지는 않은 종이들의 활자를 쓸어내려간다. 어둠이 그를 사랑하기에 지쳐 점점이 저물어갈 때. 책의 마지막장을 읽은 하나가 고개를 들자 시선은 붉은 눈 안에 침전하여 갇힌 지 오래인 모양으로, 하나는 책을 원래 자리에 꽂아 두고서 방을 조용히 빠져나온다. 아무리 일꾼이라고 하지만 이 이른 아침부터 주인의 방에서 나오는 모습을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은 아니다. 긴 복도를 지나면서, 그 누구와도 마주하지 않기를 조금 바라며 걸음소리를 죽인다.

 

일을 시작한 지 10시간 째. 여느 저택과 하는 일은 별반 다르지 않았으나-쓰지 않는 방을 청소하거나 다과를 준비하는 일 같은 잡일이었으나, 오늘은 다과를 준비하라는 말이 없었다고 같이 일하는 이가 말했다-정말 넓다고. 방금 마지막 방의 문을 재차 잠구며 상기한다. 일하는 사람도 매우 많아서 아직도 얼굴을 모르는 이가 더러 있는 터라 계단을 내려가며 저와 같이 일하는 사람들의 얼굴과 이름을 되내이고 있는 중이다. 몇은 아직 며칠이 더 지나야만 겨우 얼굴이나 알아볼까 싶지만. 나쁘지 않은 사람들인 것 같았으나 다들 일하는 데에 분주하여 서로에게 신경을 쓸 틈은 없는 이들이었다. 하긴. 어제 단 하루 본 주인이지만, 그의 성격에 맞추어 여기서 일하려면 감정을 죽이고 살아야 할 테지. 잘 기름칠 되어 삐걱거리는 소리 하나 나지 않는 나무 계단의 마지막 층계를 밟으며 하나는 생각한다.

그러고 보니 그는 아직 꿈속인 걸까. 오늘 식사를 준비하라는 이야기를 듣지 못한 것 같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아니라 듣지 못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 늦은 시간에 잠이 들었으면, 그리고 그것이 고질적인 일이라면 오랜만에 청한 단잠에 몸을 맡기는 일이 긴 여행일지도 모르겠다. 부가적인 호기심. 주인에게 품은 생각. 하나는 잠시 어제 거닐었던 어두운 복도의 끝에 시선을 머무른다. 창문이 나 있지 않은 유일한 복도. 아까 청소를 할 때 이 복도는 허락받은 이만 걸어갈 수 있다 들었다. 주인의 방이 있는 복도라 그런 것인지. 아무도 눈을 뜨지 못하게 이리 어둡게 만들어 놓은 것인지.

거기서 무얼 하느냐, 계집. 퍼뜩. 하나는 등 뒤로 들리는 목소리에 황급히 몸을 돌린다. 반사적으로 인사를 하고서 조심스레 올려다 본 눈에는 어제보다는 다소 평온해보이는 표정이 담겨 약간의 긴장을 내려놓는다. 어제, 잠자리는 괜찮으셨는지요. 책을 다 읽었을 때 잠이 드신 것 같아 인사도 하지 못하고 방을 나왔습니다.

한낱 일꾼이 고른 책 치곤 나쁘지 않더군. 오랜만에 단잠을 잤다는 것은 부정하지 않겠다. 기뻐해도 좋다. 내가 무언가를 마음에 들어하는 일은 잘 없으니.

그럴 것 같습니다. 이 말은 속으로만 삼킨다. 여튼,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저는 그럼 이만. 그와의 대면이 편치 않아 어물쩍 도망가려는 시도는 안타깝게도 통하지 않는다. 내가 언제 물러나라고 했지, 계집. 주인이 물러가라 하기도 전에 발을 떼는 것은 어떤 경망스러운 놈이 가르쳤지? 하나는 곤란함에 아랫입술을 티나지 않게 깨물고, 죄송하다 고한다. 그는 몇 번 눈을 깜빡이고는 다시 입을 연다.

오늘 밤부터 내 침소에 찾아오거라. 썩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글을 읽을 줄 아는 일꾼이 없으니 너를 부를 수밖에 없다는 걸 알아두거라. 앞으로 내가 잠들기 전 매일 어제와 같이 책을 읽어야 할 것이다. 퇴로가 막혔다. 하나는 구석에 몰린 기분으로 네, 짧게 대답한다. 그것이 그를 만족시킬 유일한 답이자 제 유일한 살 길. 그제야 그는 몸을 돌려 다시 어두운 복도 너머로 사라진다. 소리가 나지 않는 발걸음에, 어둠에 잡아먹힌 건 아닐까 싶은 이상한 의문이 든다.

어째 멀어지려 할수록 더 가까워지기만 한다. 하나는 앞으로 꽤 피곤해질 것이라 걸음을 재촉한다.

 

더 이상 읽을 책이 없다고 했다. 나무장 하나를 가득 채운 책들이었는데. 물론 얼마는 잠을 청할 때에 읽을 법한 책이 아니었고, 얼마는 그가 썩 내키지 않는 책이라 하여 넘긴 것도 있기는 했으나, 벌써 이리 되었나. 어떤 때에는 밤을 꼬박 새워 읽어달라 한 탓에 한 권이 아니라 여러 권을 읽은 적도 있기는 했지만 시간은 자신이 잡든, 잡지 않든 정신없이 흐른다.

그는 책을 사러 가야겠다 말했다. 물론 네가 동행해야한다, 계집. 내 수준에 맞는 책을 골랐다가는 네가 한 자도 읽지 못하면 어쩔 것이냐. 그는 내일 일을 하루 쉬고 나갈 준비를 하라 명했고 하나는 꽤 나쁘지는 않은 일이라 생각했다. 물론 그와 단 둘이서 길을 나서는 게 편하지만은 않지만. 나름 지금까지 보낸 시간은 낯선 감정을 닳아 무디게 하였으니. 이른 아침, 하나는 시간에 맞추어 나갈 준비를 끝낸다. 그러고 보니 쉬는 날에도 이곳을 나갔던 적이 없는 것 같아 꽤 기대되기도 하고. 옷매무새를 다듬고 저택을 나서자 시간이 되지 않았음에도 나갈 채비를 끝마친 주인이 마차 옆에 서 정원을 둘러보고 있다. 하나를 발견하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는다.

나를 기다리게 하다니, 시간이 지나도 건방진 계집이군. 입꼬리를 올리고 있는 표정에 하나는 긴장하지 않는다. 약속시간이 아직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누군가 일찍 나와 있었나 봅니다. 하나도 따라 가볍게 웃곤 마차에 오른다. 불쾌한 기색은 그에게서 비쳐지지 않는다. 퍽 재미있어하는 눈치다.

장터까지 가는 데에 오래 걸리지는 않는다. 마부의 운전실력이 탁월하다고 하던데 그 덕인가. 하나는 그의 옆에 나란히 서 차분히 걷는다. 일꾼이 어떠한 연유로 주인의 옆에 나란히 걷는 행위를 하겠느냐만, 그는 언제부턴가 등 뒤가 아닌 옆에서 걷기를 종용했다. 네가 내 뒤에서 무슨 짓을 하고 있을지 어찌 알겠느냐. 내 격을 떨어트리는 행동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조금은 억지스러운 이유였지만 하나가 이를 거부할 권리도, 이유도 없었다. 고로 그의 옆에서 걸음을 같이 할 수밖에는. 분주한 시장에서 둘은 책방을 찾아 느긋이 걷는다.

이거 길가메쉬님 아닙니까. 꽤 가까운 거리에서,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분명한 달가운 목소리가 들려와 둘은 똑같이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하나에게는 낯선 얼굴의 한 남자. 따라 주인의 얼굴로 시선을 돌린다. 반가워보이는 기색에 친분이 있는 사이라 생각한다. 여긴 어쩐 일인가. 잠깐의 휴식인가? 오랜만에 보는군. 일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나? 자신은 감히 끼어들지 못할 대화가 시작될 것 같은 기미에 하나는 길가메쉬에게 우선 귀띔한다. , 먼저 책방에 가있도록 하겠습니다. 이야기 나누시다 천천히 오셨으면 합니다. 그의 표정이 잠시, 의아함으로 들어찼던 것 같다. 하나는 걸음을 옮긴다. 자신이 있어 쉬이 꺼내지 못할 대화가 생길지도 모르는 일이다. 다른 일꾼들보다 가까운 위치에 있는-이를 부정하지는 못하겠다-자신이지만 그것이 모든 권리를 허용한다는 의미와 통상 들어맞는 것은 아니다. 멀지 않은 거리의 책방에 도착하여 책을 하나씩 훑어보는 것으로 그를 기다린다. 꽤 괜찮아보이는 것들이 여럿 눈에 띈다. 자신이 읽을 수 있는 책을 고르라 그랬으니 몇 가지 정도 솎아내어 놓는 것도 괜찮겠지.

한 손에 겨우 잡힐 정도의 책을 골랐을 때쯤, 길가메쉬가 걸어오는 것을 발견한다. 이야기는 즐겁게 나누셨습니까. 미세한 표정변화가 있으나 하나는 읽어내지 못하는, 기분이 좋아보이는 그는 고개를 끄덕인다. 부동산 중개업자지. 요즘 꽤 기대를 걸고 있는 땅이 있어 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오는 길이다.

책은 다 골랐느냐. 하나의 손에 들린 책에 눈길을 주며 묻는다. 제가 골랐으니 한 번 읽어보시는 게 낫지 않으시겠습니까. 혹여나, 마음에 안 드신다면. 하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입을 열어 말허리를 자른다. 지금까지 고른 책이 썩 나쁘지 않았으니 이번에 네가 고른 책들도 못 들어줄 정도는 아니겠지. 다만 재미가 없다면 경을 칠 줄 알아라. 그럼 지금 미리 봐 주시면 안 되는 건가. 하나는 속으로 불만을 토로한다. 여튼 못된 주인이다. 사실, 아직까지 그가 저를 혼낸 적은 없어 그리 두렵게 느껴지지는 않지만. 저는 꽤 똑똑한 편 아니었습니까. 당신이 고른 일꾼이지 않습니까. 아마 길가메쉬님을 실망시켜드릴 일은 없을 것 같은데요. 적당히, 기분 나쁘지 않을 반박을 던지는 것도 잊지 않고.

제 말을 들은 길가메쉬는 꽤 마음에 드는 눈치다. 언젠가, 책을 읽던 밤중 솔직하여 나쁘지 않다는 칭찬, 아마도 칭찬을 들은 일이 있다. 그전부터도 사실 제 욕심이 투영된 말을 가리지는 않았으나, 그 후에도 자신의 자랑이나 욕심들을 더 스스럼없이 내뱉고는 했다. 그에 따라오는 주인의 흥미로운 표정이 이를 멈추게 해줄 리는 없었고. 하나는 그가 참 독특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필요한 것은 없느냐. 밤 시중을 들어준 보상으로 내리는 것이니 달갑게 생각해보거라. 무엇을 말해도 그것을 뛰어넘는 물건을 눈앞에 보일 수 있는 권력의 주인이 제게 가지고 싶은 것이 없느냐 묻는다. 그러나 그것을 제게만 쓰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을, 하나는 망설임을 갖는다. 어떤 이들보다는 그를 많이 알고 있겠지만, 그것이 저를 만족시킬만한 정도는 아니다. 한 번도 책을 고른 적이 없는 그는 무슨 책을 읽을까 하는 소소한 의문이 구름처럼 피어오른 탓이다. 저는, 주인께서 읽으시는 책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당신께서 원하는 책이 제게는 필요하네요. 훌륭한 주인이 읽는 책을 감히 제가 읽어도 된다면 제게는 더할나위 없이 좋은 선물이 될 것 같은데요. 제 도넘은 욕심입니다.

어떠십니까. 제게 기꺼이 안겨주실 수 있으신지요. 미소 짓는다. 상상으로 꽤 기분 좋아지는 일이었기 때문이리라. 그는 시원스레 소리내어 웃더니 주인을 불러 무어라 말한다. 잠시 기다리라며 안쪽으로 들어간 주인이 꺼내온 책은 하나의 손으로 건네진다. 니콜라이 레스코프의 맥베스. 내 수준에 걸맞은 책이라고 생각하니 똑바로 읽거라. 네게 기꺼이 허락해줄테니. 길가메쉬는 주인에게 값을 치르고 유유히 길을 빠져나간다. 맥버스. 이름을 한 번 중얼거려본 하나도 그 뒤를 따라 걷는다. 그는, 자신이 잠들기 전에 읽는 것도 허하겠다 말했다. 생각이 짧은 제게 여러 이야기를 해주겠다는 말도 잊지 않고 덧붙여서. 하나는 그러하겠다, 뜻을 따른다.

 

하나는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 확실한 물증은 없으나, 똑같은 일을 해도 저만을 닦달하는 하녀장의 행동이 의심에 칼을 새기게 만든다. 무엇 때문에 자신이 미움을 샀는지도 통 알 길이 없다. 그와는 그리 마주할 일도 없는데.

쓸데없이 저를 못살게 굴었다. 그저 시원스럽게 무시하는 것이 답이라고 생각하는 하나에게도 꽤나 골머리를 앓게 하는 일이었다. 차라리 제 면전에서 빼도박도 못하게 타당한 이유도 없이 자신을 괴롭히고 있다는 걸 보이면 분명히 갚아줄 길이라도 있을 텐데. 일을 갑작스레 떠맡겨놓고 해결이 늦으면 여느 사람들이 그러하듯 꾸짖는다던가, 분명 평소처럼 똑바로 일을 끝마쳐놓았는데 다른 일을 하던 와중에 불러내어 일처리를 꾸짖으며 다시 해놓으라 성질을 부리는 둥. 차마 그 어느 곳에도 트집을 잡을 수 없는 방법으로 저를 힘들게 했다. 저도 일꾼 중 하나에 불과하면서.

어제도 잠이 들 법한 늦은 밤에 책잡혀 겨우 잠을 청했건만, 하필이면 오늘은 중요한 손님이 있어 아직 피로가 겹겹이 쌓인 눈을 뜨고 다시 부지런해 질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자신이 오늘 하게 된 일이 다과와 차 같은 것들을 미리 준비해놓는 일이라는 것. 결국 주인의 취향이 가장 깊게 관여하는 일이라 한 번 제대로 깨져보라는, 주인의 손을 빌려 저를 괴롭히려는 수작임이 분명히 보였으나, 그편이 차라리 나았다. 적어도 악의가 가을의 독뱀이 품어놓은 독기마냥 뭉쳐져 있지 않은 이에게 좋지 못한 소리를 듣는 것이 더 가볍게 날려보낼 수 있었으니. 조금 어지러운 걸음이었다.

 

아기자기한, 색깔이 고운 다과들이 맑은 소리를 내며 그릇에 담긴다. 이건 빼고. 이건 조금 더 담아놔야 한다. 이건 한 주먹 정도. 그는 하얀 이 다과를 마음에 들어했다. 그리고 꽃잎이 들어간 다과는 두 번이나 내어보았지만, 한 번도 줄어든 걸 본 적이 없다. 그가 손도 대지 않는다는 뜻이리라. 더하여 항이 좋은 차. 주인은 직접 물을 붓는 것을 좋아한다. 작은 수저로 찻잎을 몇 번 덜어 망에 넣어두곤 주전자의 뚜껑을 조심스레 닫는다. 이거면 아마도 다과 준비는 다 했을 터인데. 주인에게 거슬리는 일이 없으면 좋겠지만 모든 걸 걸 정도의 기대는 하지 않는다. 그럼 이제 무엇을 해야 하나.

주인 앞에서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건 마당에 묶인 개도 안 하는 짓이건만.

언제 나타났는지. 일말의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는데. 그렇지 않아도 꽤 곤두서 있던 신경인지라 평소 같으면 그러려니, 답했을 텐데 하나는 잘게 움찔하는 기색을 보인다. 날이 선 고양이 같은 모양새에 그는 짧은 의구심을 품은 듯 했으나, 고개를 돌려 그의 눈과 마주하는 깊은 밤과 입 맞추자 여느 때와 같은 눈빛을 하고서 그릇에 놓이고 있는 다과를 논한다. 이건 웬일로 놓지 않았느냐.

있어도 드시지 않기에 아예 놓지 않았습니다. 저 하얀 다과는 좋아하시는 것 같아 꽤 넉넉하게 담아놓았습니다. 전에 손님이 방문했을 때에 몇 남기지 않고 다 드셨기에 그리 하였는데, 마음에 드시지 않는다면 다시 바꿔놓겠습니다. 여러 번 보았던 다과 접시이다. 부러 기억하는 것은 아니지만 쉬이 잊을 수 있는 것도 아니라. 잠시, 그는 말이 없다.

아니다. 되었다. 그것보다 꽤 몸이 좋지 않아 보이는 군. 무엇이 너를 괴롭히기라도 하는 것처럼. 아니면 일이 부쩍 고단하기라도 한 것이냐. 눈이 아픈 지금도, 하나는 여전히 화려한 그를 담은 채 말을 어찌해야 좋을지 고른다. 그에게 이런 사사로운 일을 말하는 것은 꽤 건방진 것 같기도 하고 스스로가 생각해도 치졸하게 느껴지지 않는가. 하지만 지금 당장 무너져내릴 것만 같은데. 조금만 더 붙잡자고 스스로를 다독이면서, 하나는 약간의 틈을 만든다. 별 것 아닙니다. 어제 글을 읽어드리고 잠을 청하려 했는데 그게 조금 잘 안 되었나봅니다. 신경써주시는 것 같아 감사합니다만, 걱정하실 정도는 아니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시선이 짙게 깔린다. 거짓말을 하는 것은 익숙한 일이 아니다. 어떤 말이든 거슬리는 것이라면 입을 막는 법이 없는 터라 특히. 그는 과연 속았을까.

요즘 부를 틈도 없이 바빠보이긴 하더군. 누가 그리도 정신없이 부리는지는 모르겠다만. 의미심장한 말은 칼집을 들고 있는 사람과도 같다. 칼이 들어있는지, 들지 않았는지 알 수 없는.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는 눈치로 말하는 것 같은데 만약, 아니라면. 하나는 예리한 그의 말을 어찌 피해야 좋을지 고민해보지만 이렇다 한 답은 나오지 않아 울렁인다. 지끈거리는 머리도 나아질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 제가 기대에 응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일을 미리미리 해치웠어야 하는 건데. 앞으로는, 그럴 일 없도록 해보죠, 길가메쉬님. 피곤한 기색에서도 웃곤, 하나는 꾸벅 인사를 하고서 응접실을 빠져나온다.

숨이 막힌다. 그의 눈이 살벌한 얼음장과도 같이 느껴졌다. 그것이 저를 향한 것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았지만, 모든 것을 알고서 제게 심문하는 사람마냥. 어지럽다. 방을 나오자마자 긴장이 풀린 탓인지 시야가 어지러운 공기마냥 핑 돈다. 잠깐 잠을 찾고 싶다. 아주 잠깐만.

 

3일 정도를 내리 잤다고 했다. 일을 하면서 저와 꽤 친해진 동료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식사를 가져다 준 김에 해준 말이다. 따뜻한 죽을 몇 숟갈 떠먹는 동안 동료가 꺼내어 놓은 이야기들은 이러했다. 어쩐 일인지 응접실 앞에 쓰러져있는 것을 주인이 안아들고서 그의 방에 데려다 놓았고, 원래 그의 방에 들어가는 이는 한정적이었으나 아무도 방에 출입하지 못하게 했다고 하였으며, 열이 꽤 많이 끓어 의사만 두 번 정도 방문했을 뿐 외에는 제 얼굴 한 번 보지 못했다고 했다. 어제 밤에 열이 내려 주인이 어쩐 일인지 저를 불러-어째서 저를 불렀는지는 알 수 없다고 했다. 혹시 너랑 내가 친하다고 말한 적 있니? 하나는 자신의 개인적인 관계까지 시시콜콜하게 주인에게 떠들 정도로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다-방까지 가진 않고 그 어둠이 시작되는 복도에서 제게 방으로 안내하라 말했다고 했다. 복도의 제일 끝 방. 그곳까지 안내를 하고 난 후 주인은 제게 밖에서 기다리라 하였고 그는 달을 보는 것이 지루해질 때 쯔음 방에서 나왔다고 말했다. 그러곤 제게 잠에서 깨면 식사를 챙겨주라 말하곤 다시 돌아가는 모습을 보였다. 평소에 네가 일을 잘 하니까 신경이 쓰였나 봐. 죽 먹을 만 해? 그가 그정도로 자신을 챙겨준다라. 의문이 생겨날 수밖에 없는 걸까, 아니면 정말 그저. 지나치지 못할 이의 호의인가. 맛있네. 근데 아직 그리 배고프지는 않은 것 같아. 다는 못 먹겠네. 하나는 웃으며 그릇을 넘겨주었고 아이는 이제 다시 일하러 가 봐야겠다며 그릇을 받아 저녁에 또 보자며 인사를 한다. 그에게 원치 않는 빚을 졌다. 이따 인사를 하러 가야 할 것이다. 그에게 무어라 고마움을 표시하는 것이 좋을지, 꽤 어려운 고민이다.

맞다, 하나. 하녀장, 이틀째 행방불명이래. 야반도주라도 했나, 방도 전부 비었어.

 

꽃놀이를 가는 길이다. 벚꽃이 꽤나 만발했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이쯤 되었으면 너는 내가 어딜 가든 따라갈 준비를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당장 일꾼들이나 해야 하는 일이 있으면 어찌하려고 그런 생각도 안 하고 있는지. 다른 것들을 데려가야 할 명분이 없지 않은가. 길가메쉬는 언젠가부터 소소한 외출을 하러 나가는 때면 꼭 저를 동행해야 한다며, 의아한 하나에게는 짜증난 목소리로 이 말을 늘어놓곤 했다. 주인이 일꾼 하나 없이 집을 나서는 게 말이나 되냐며. 아직까지 이를 가르쳐야 하냐 가볍게 질책했다. 그럼 하나는 이기지 못하는 척, 알겠다며 준비를 했고. 제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쁘게 그를 따라다녔다. 물론 나쁘지는 않았다. 넓은 저택이 갑갑하지는 않았지만 그것과 바깥 세계는 분명 다르니까. 그를 따라다니며 나쁘지 않은 경험을 하는 것도 좋았고 자신이 알아가는 것이 넓어지는 것도 좋았다. 그와 단둘이서 보내는 시간도 이제는 익숙해서 어찌해야 좋을지 모를, 행동을 고르는 시간도 굳이 만들어내지 않았고. 돌아보면 모든 시간에 그가 들어있다는 건 조금 의아한 부분이기는 했지만. 그저 나쁘지 않은 총애를 받는 것으로 여기기로 했다.

지금은 잠시 잠들어있다. 늘 나쁘지 않은 잠을 자지만 봄이 가져다주는 노곤함에 이기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작게 덜컹거리는 마차에서 미미하게 느껴지는 진동에도 깨지 않는 하나를 반대편에서 바라보며 길가메쉬는, 꽤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는다.

아름답게 우는 새를 새장에 담았다. 하늘을 자유로이 날던 새가 새장에 갇혔으니 슬피 울다 괴롭게 죽어갈까. 그럴 것이라면 그가 새를 잡았을 리가 없다. 기껏 잡은 새를 그리 쉬이 죽게 만들어버릴 리가. 그런 멍청한 짓은 머리가 나쁜 잡종들이나 저지르는 오만한 실수. 새가 그곳이 새장이라는 걸 모를 정도로 드넓은 새장을 지어준다면, 그 새는 영원히, 제 옆에 있는 동안 아름다운 노래를 부를 것 아닌가.

그래, 너는 지금 이곳을 새장이라 눈치채었을까. 제 앞에서 기분 좋게 잠들어 있는 새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 새장에서 나오지 않는 이상 제 곁에서 떠나갈 수 없는 새. 아프게 날개를 꺾지 않아도, 피가 흐르게 다리를 부러트리지 않아도, 여느 때와 같이 평화로운 삶을 살 수 있는 새. 완벽한 방법만을 고수하는 것이 제게 걸맞는 행위가 아니었던가.

아직까지 울음 한 번 터뜨리지 않은 새. 너는 영원히 이곳을 새장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겠지. 만족스러운 미소. 찰랑거릴 정도로 가득 채워진 욕심의 잔. 길가메쉬는 따라 눈을 감는다. 날씨가 좋으니 기분 좋은 단잠을 청해도 나쁘지 않으리라. 밤에 잠이 오지 않는다면, 네가 꽤 길게 글을 읽어줄 것이었으니.

긴 밤에 너를 가두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