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滅]감염
꽃으로 제대로 만족하지 못한 것 같으니 식사라도 한 끼 대접할 수 있도록 허해주는 게 어떻겠나, 계집. 꽃을 끝내 돌려보내려 하는 하나에에게 그가 제안한 말이었다. 저는 지금 연주를 눈으로 확인하고 그들을 돌보는 데에도 바빠요. 단호하게, 큰 칼은 아니었으나 날이 제대로 들어선 작은 칼로 네 말을 베어낸다. 그러나 너는 눈을 깜빡거리며 재차 웃는 것으로 반응을 보이며 하나에를 당혹하게 만든다. 연주가 끝난 후에 식사 정도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계집. 네가 이렇게까지 치를 거부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만. 나는 순수히 네 음악이 좋아 연주를 보러 온 수많은 사람들 중 하나일 뿐이야. 그저 좋은 의도로 식사 한 번 같이 하자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인가? 아니면 단순 개인적인 의도가 아니라 내가 투자하는 사람의 비즈니스적 관계라면 이렇게 내쳤을 것인가? 이 무대에 내 손길이 꽤 뻗쳐있다는 걸 못 들은 모양인가, 총명하게 생겨서는. 그 말인 즉슨, 제 무대에 당신의 개입이 존재했다는 것일까. 금시초문이다. 하나에는 잠시 어지러움이 섞였을 혼란을 시선에 담아 그 붉은 눈과 마주했고. 너무나도 큰 불구덩이 저를 삼킬 것처럼 휘어지게 웃고 있는데. 하나에는 마른 침을 삼키고서 시선을 잠시 아래로 깐다. 어쩌겠느냐, 계집. 물론 식사를 거절한다고 해서 지금 준비한 네 무대를 철회하라는, 그런 옹졸한 것들이나 하는 속좁은 짓을 하지는 않을 테지만 말이야. 그는 그 잘난 얼굴로 썩 사람 좋게 웃어보이며 제게 그런 협상을 하자 한다. 뭐라고 하는 게 좋을까. 당신의 도움이 없어도 무대를 너끈히 널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은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지금 자신이 두려운 것은, 무대를 열 수 있느냐에 대한 경제적인 문제가 아니라, 마치 모든 것을 무너뜨릴 것 같은 당신의 눈길에. 하나에는 잠시 호흡을 고른다.
좋아요. 쓸모없는 꽃을 받았으니, 기분 전환으로 식사를 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죠. 단지, 그뿐이에요. 하나에는 잘게 떨리는 목소리지만 분명하게 들리는 목소리로 그에게 오롯이 뜻을 전달했다. 당신에게는, 일말의 감정 따위 싹트지 않았다는 것을 알려주고자 하여. 영리한 그는 말의 뜻을 분명하게 알고 있겠지. 돌려 말한다고 흔한 착각에 빠져 사람들을 괴롭히는 멍청이들과는 다르게. 물론 그는 착각에 빠지지 않아도 자신을 어둠 속으로 빠트리는 데에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같이 식사를 즐기기 전에,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끼리 무대를 관람하는 것도 괜찮다고 보는데. 꽤 좋은 좌석인데 같이 보기로 한 일행이 오질 않아서 말이야. 계집, 괜찮다면 네가 내 옆자리에 앉아도 좋다. 그건 자신이 바라는 일이 아님에도 마치, 자비를 베푸는 사람마냥. 하나에는 그를 지나쳐 무대로 다시 올라간다.
종잡을 수 없이 곤란한 사람이다.
무대는 언제나 그러했듯 꿈과도 같았다. 자신의 음악이 연주되는 완벽한 밤. 제 음악이 완벽하지 않아도, 이를 연주한다는 사실과 수많은 사람들이 이를 들으러 먼 길을 재촉하여 달려왔다는 사실은, 무대를 한 번 세워 본 사람들은 절대적으로 사랑할 수밖에 없는 중독적인 감각. 물론 오늘은, 그 시간이 마치 신데렐라의 무도회장 같은 비참함을 결말로 삼아야하는 시한폭탄과도 같았지만. 무대가 끝나면 당신과 다시 만나야 했으니까. 이제는 놀라지도 않게, 당신은 무대가 끝나기 무섭게 제 자리를 찾아와 저를 보며 잔잔한 미소를 그리고 있었다. 자신이 여기 있는 줄은 또 어찌 알았을까, 싶지만 그런 일에 머리를 쓰는 것은 포기하기로 한다. 그에게 점점 익숙해져가는 감각이 일순, 저를 소스라치게 했지만 아랫입술을 얕게 깨무는 것으로 고통을 치환시켜보려 애쓴다. 좋은 무대였는데. 가히 사람들이 사랑할만 해. 칭찬을 싫어하지 않으나 그의 입에서 흐르는 달콤한 말들은 독사과와도 같아 귀를 꼭 닫아버리고 싶다는 말도 안 되는 충동과 함께 제게로 치사량만큼 새어든다. 저를 마비시키던 당신의 말처럼 무섭게 전염된다. 원치 않는 괴로움이다.
식사를 하러 당신의 차에서 시간을 죽이는 것도 퍽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어떤 곡이 더 좋았다고 말하는, 그의 감상을 듣는 것은 그나마 괜찮은 일이었지만. 금빛으로 점칠된 남자는 남들은 잡아내지 못한 연주의, 자신이 신경썼으나 사람들은 무심코 지나친 것들을 전부 꿰어내 읊어내고 있었으니까. 취향이 저급할 것이라 생각지는 않았지만 저런 것까지 눈치챌 줄은 몰랐는데. 하나에는 감사합니다, 짧은 인사로 마음을 대변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와 긴 말을 나누고 싶다는 의미는 아니니까.
당신이 꽤 마음에 들어한다며 저를 이끌어 준 레스토랑은, 하나에의 눈에도 모자라지 않을 정도로 마음에 드는 곳이었다. 눈부신 주변 조형물, 깔끔해보이는 외관, 아직 들어서지도 않았는데 꽤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친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하는 건 그의 선택임에도 좋다 말해줄 법한. 길가메쉬. 그는 꽤 다른 의미로 무서운 사람인지라. 둘은 레스토랑 안으로 걸음을 옮긴다.
마음에 드는 눈치군. 당신은 황혼을 찾으며 그 붉은 눈을 휘어지게 웃으며 친절한 목소리로 하나에의 평가를 기대한다. 칭찬하고 싶지 않은데. 당신과 손을 맞잡은 이유로 병에 걸린 것처럼 자꾸 당신에게 걸려드는 기분이 들어 머리가 아프다. 나쁘진 않다고 할게요. 그래도, 식사를 대접해주겠다 받은 건 고마운 일이니까. 그와 엮이고 싶지는 않으나 최소한의 예의까지 지키지 않는 건 그녀에게 어울리는 일이 아니다. 그는 그 인사에 만족스러운 얼굴을 비친다. 하나에는 앞에 놓인 물에 손을 뻗는다. 갈증이 난다. 꼭 열병이 난 사람마냥.
내가 마음에 들어하는 몇 안 되는 식당이니까. 아마 계집, 네 입에도 잘 맞을 것이다. 나는 최고의 것만 가져야하는 사람이니까. 주문한 음식이 앞에 차려지고, 그의 앞에 붉은 피와도 같은 포도주가 놓였을 때 그가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한 말이다. 그래. 나쁘지 않았다. 제 몫의 포도주도 투명한 잔에 아름답게 넘칠 듯 흘러내렸고. 하나에는 요리에 시선을 고정한 채 나이프를 들어 따뜻해보이는 고기를 썰어내기 시작했다. 음식에 모든 걸 집중할 정도로 굶주린 탓이 아니라는 건 모두가 알 것이라. 그녀의 눈은 그리 갈구하는 간절함이 녹아있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맛이 없지는 않았다. 맛있었다. 그래. 그와 같이 있지 않았으면 더 돋아났을 식욕에 훨씬 나은 평가를 내렸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째서 너는 연주를 하지 않지? 이야기가 꺼내어져도, 눈은 그 반짝임을 담지는 않고. 제 연주를 꼭 선보여야할 자리는 아니었으니까요. 제가 만든 곡으로도 사람들은 즐거워하잖아요. 이번 무대는 그걸 위해서 열린 무대였고, 제가 연주하기 위해 열린 무대는 아니니까요. 안타깝군. 계집. 네가 연주하는 게 꼭 보고 싶은데 말이야. 불구덩이 같은 눈에 피와도 같은 와인이 담기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저도 모르게 그에게 시선이.
제 연주라고 해 봤자 별 거 아니에요. 오히려 그 사람들이 제 곡을 더 잘 연주할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그들은 매일 살기 위해 그것만 하는 사람들이니까. 와인을 마시는 그 모습은 이상하게도, 꼭 사람의 피를 먹고 있는 뱀파이어같다. 사람의 모습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이질감. 저와 동류가 아닌 이에게서 느껴지는. 하나에는 음식을 남기고서 나이프와 포크를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내려놓는다. 덕분에 맛있는 식사였네요. 길가메쉬. 당신만 없었으면 더 좋았을지도 모른다는 말은, 잘게 삼키기로 하고. 그는 입도 대지 않은 하나에의 와인잔에 썩 좋지 않은 눈길을 보낸다. 작게 술 한 잔 정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한데. 유흥을 모르는 사람인가보군. 아니면, 내 앞이라 감히 술을 마실 수 없는 건가? 어느 이상한 생각을 품는 잡종들처럼 약은 타지 않았으니 자유로이 마셔도 좋은데 말이야.
그런 짓을 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손에 쥘 수 있으니 말이야. 너는 내 운명이니까. 당신은 와인잔 바닥을 채운 나머지 것들을 느릿하게 삼킨다. 그래. 결국 당신은 네게서 떠날 수 없다는 이야기겠지. 제게는 달콤한 말로 들리지 않지만.
미련한 짓이에요. 저는 당신을 좋아하지 않잖아요. 길가메쉬. 하나에는 조곤조곤. 웨이터들이 그릇을 치우고 떠나는 사이 그에게 통하지 않을 말을 한다. 너무 잘 알고 있잖아요. 제가 당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거? 그런데도 왜 이렇게 저를 단단히 붙잡고 사랑을 얻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죠? 당신은 똑똑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셧은, 꽤 괴로운 일이지만 운명의 상대와만 만나는 게 아니잖아요. 상대가 셧이 아닌 이상. 영원히 사랑받지 못할지도 모르는데 제게 이렇게 목매는 게 꽤 우습네요. 와인잔을 넘어트리고 싶다. 하얀 테이블보에 붉은 자국을 선명하게 남겨버리고 싶은 나쁜 충동에 휩싸인다. 당신의 행위가 전부 제게로 쏠려 숨이 막히기 때문인지. 일탈을 하고 싶은, 그러나 그러기에는 너무 나이가 많아진 어른처럼. 미동 하나 없는 와인잔에 시선을 고정한다. 당신은 무어라 반응할까. 화를 낼까, 아니면 정말 미련 없이 가볍게 자신을 포기할까. 후자는, 세상에서 일어날 수 없을 일 같지만. 하나에는 결국 그와 눈을 마주한다. 자신을 잡아먹을 것 같은 붉은 눈이라 마주하고 싶지 않았는데. 그러나 하나에의 심장을 떨어지게 만든 것은, 그의 웃는 얼굴이라서.
왜 내가 너의 사랑을 받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지, 계집? 너는 빈 와인잔을 내려놓고 몸을 작게 앞으로 숙인다. 텅 빈 와인잔과 가득찬 와인잔. 그가 와인잔을 내려놓음과 함께 흔들리는 하나에의 와인이 붉다. 잠시 시선을 뺏길 틈도 없이 그는 손을 뻗어 하나에의 손을 자연스럽게 가져간다. 이런. 당신과는 단 일 초도 닿아서는 안 되는데. 흠칫하는 하나에의 손등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하게 기꺼이 입을 맞추고. 당신은 또 입 한 번 움직이지 않고 제게 부드럽게 속삭이지. 내가 이렇게 당신을 사랑하는데. 당신이 나를 사랑하지 않을 리가. 하나에. 공손히 입을 맞추고 있는 동안 저를 올려다 보는 보석같이 아름다운 붉은 눈. 제 귓전을 울리는 사랑의 고백. 응? 내가 이렇게 당신을 사랑하는데. 당신이 나를 사랑하지 않을 수는 없지. 아니라면, 나는 당신이 나를 사랑할 때까지 사랑한다 고백할 텐데. 나는 정말, 당신을.
목소리가 흐려졌다. 당신이 제게서 손을 놓고 아무렇지 않은 듯 자리에 앉았던 탓이다. 당신을. 거기서 그가 하는 고백은 배배 꼬인 실타래처럼 힘없이 끊어져버렸다. 알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당신이 하는 말 따윈 그냥 무시해버려도 좋다고 생각하는데. 그 뒤에 당신이 무어라 마음을 토로했을지 궁금해져. 하나에는, 그에게서 눈을 떼어내지 못하고.
나와 사귈 생각은 없나. 운명이라 결혼하자는 말까진 하지 않을 터이니. 너를 사랑하는 사람과, 최고만 손에 쥐는 사람과 사랑을 나누는 것은 꽤 나쁘지 않은 거래다. 계집. 나는 그럼, 네가 듣지 못한 말을 매일 직접, 속삭여줄 수 있는데 말이지. 제 표정에서 무엇인가 다 드러나기라도 한 걸까. 마치 당신이 심인 것처럼. 내 마음을 전부 다 긁어낸 사람처럼. 당신의 말에 호기심을 품은 건 어찌 알고.
...좋아요. 나쁘지 않은 거래에는 따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하지만 내가 당신을 정말 진심으로 사랑하는 날이 올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으면 해요. 당신이 가지고 태어난 종족에 기대어 지금 품고 있는 사랑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궁금하기는 하지만, 내가 당신에게 가지게 될 감정은 내 것이 아닐 테니까. 그건 내가 사랑으로 추락하여 만들어 낸 감정이 아닐 테니까. 길가메쉬. 그저 나는 당신에게, 당신의 사랑에 전염되다 못해 감염되어 열병을 앓아 헛소리를 하고 있는 것뿐이니까.
하나에는, 만족을 품은 그의 얼굴에 심장이 뛰는 소리를 귓전에서 듣는다. 그래. 저는 사랑에 감염된 것이다. 전염되다 못해, 온전히 병을 삼켜버리고 만 것이다. 사랑을 시작한 것은, 감염 때문이다.
지독한 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