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바안즈]눈치게임
교복에 리본까지 단단히 매고서. 안즈는 단정하게 교복을 차려입은 채 제 옆에 놓여있는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책상에 놓여 있는 달력에 일렬로 늘어져 있는 숫자들 중 오늘의 날짜를 알리는 수는 토요일의 경계선 안에 깔끔하게 프린트 되어 있었다. 오늘은 주말. 교복을 입어야 할 의무가 주어져 있지 않은 토요일. 그런데도 안즈가 리본까지 매만지며 교복을 차려 입은 이유는 스바루와의 약속 때문이었다. 학교에서 산책을 하자는, 꽤나 습관이 되어버린 주말의 약속. 학교에 들어가려면 아이돌 학교의 치안상 무조건 교복을 입어야 하는 게 규칙이니까. 안즈는 리본이 모나게 삐뚤어지지는 않았는지 포근한 온도를 품고 있는 햇빛을 받은 거울을 보며 재차 확인하고는 침대에 풀썩 힘없이 주저앉았다. 조용한 공기 속에서도 홀로 째깍거리며 명쾌하게 흘러가는 시계는 아직 약속시간에 도달하기 한참 전. 아, 너무 일찍 준비했나.
...언젠가부터 어딘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약속 날짜가 돌아오려면 꽤나 한참이나 남았는데 괜스레, 언제 약속 날짜가 될까 조바심이 나서 휴대폰 화면을 켜 오늘의 날짜를 하루에 몇 번이나 확인하기도 했고 서로 학교에서 만나는 탓에 입을 수 있는 옷이 교복 말고는 없는 데에도 옷을 어떻게 입는 게 좋을까 일주일 내내 고민 아닌 고민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 약속을 한 전날이 되면 잠을 자려 하다가도 내일이 약속이라는 사실에 괜히 부스스하게 이리저리 뒤척여보기도 했다. 어째서? 전학 오고 이제는 익숙해졌다 싶을 만큼 편안한, 다이키치의 산책일 뿐인데. 아이러니하게도 날이 갈수록 산책을 하는 시간은 그리 편해지지만은 않았다. 스바루 군과도 이제는 전학생이 아니라, 편한 친구일 텐데. 어색한 기류가 흐르는 시간은 이미 지나버렸을 텐데. 게다가 스바루 군과는 처음부터 그 특유의 성격 덕분에 거리의 길이를 재어 볼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을. 꽤나 이런저런 생각이 겹치자 머리가 복잡해진 안즈는 끄응, 앓는 소리를 내며 눈을 꾹 감았다가 뒤로 벌러덩 누워버렸다. 뺨을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머리칼이 간지럽다고 속으로 생각하면서도 그 머리카락을 치우지 않은 손가락 끝을 지그시 바라보면서. 어째서. 이렇게 모든 게 조심스러워만 질까.
째깍. 째깍. 시간은 느리면서도 하릴없이 흐른다. 생각보다 너무 일찍 일어나버린 탓일까. 창살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에 괜스레 노곤해진 안즈는 잠시만, 눈을 감고 있자고 생각한다. 아직 약속 시간까지 한참, 남아있기도 하고 잠깐 정도 눈만 감고 있는 건 아무 일도 없을 거니까.
이상하게도 잠이 오는 날이었다.
*
“진짜 미안해, 스바루군...”
안즈는 울망이는 목소리로 말한다. 아, 정말. 그때 그렇게 잠들어버릴 건 뭐람. 잠시 눈을 감고 있자 다짐했던 안즈는 그동안 프로듀스로 누적되어 온 피로가 한 번에 몰리기라도 한 듯 눈을 떴을 땐 약속시간이 지난 지 40분이나 지나있었고 화들짝 놀라 손을 뻗은 휴대폰에는 상황을 수습할 틈도 없이 스바루에게서 전화가 걸려오고 있는 화면이 반짝거리며 울리고 있었다. 아. 이걸 어쩐담. 파도처럼 밀려오는 죄책감에 안즈는 석고대죄를 해야만 죄를 사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놀란 손으로 겨우 화면을 만져 전화를 받는다. 잠시간의 침묵. 얼마 있지 않아 안즈? 하고 들려오는 다소 낮게 깔린 목소리. 평소의 높은 텐션은 어디로 가고. 설마 화가 나기라도 한 걸까. 설상 정말 화가 났다고 하더라도 안즈는 변명조로도 할 수 있는 말이 없다. 자신 때문에 40분이나 기다리고 있었을 걸 생각하면, 그것도 연락도 안 되는 답답한 채로. 어쩌지. 저도 모르게 꿇은 무릎에 손가락으로 치맛자락을 꼼지락거리면서 건너편에서 나올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한참이나 수화기 너머에서는 말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그에 따라 같이 죽어지는 숨소리. 안즈는, 치맛자락을 꼭 잡았다.
‘...그러면 우리, 오늘 학교가 아니라 다른 곳에서 볼래? 내가 전학생네 집으로 갈게.’
어라.
공포스러운 장면이 나올 것 같아 꼭 눈을 감고 있던 검은 모니터에서 마치 앙증맞은 동화책의 곰 인형이 튀어나오기라도 한 것 같은 아이러니한 상황. 어라라. 방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 안즈는 긴장이 풀려 치맛자락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이 사라지는 걸 느낀다. 화, 안 내는 걸까. 어리둥절함이 사라지지 않은 가운데 안즈는 방금 들었던 문장을 재차 곱씹어본다. 우리 집으로 온다고?
“아, 아니. 스바루 군. 그럴 필요까지는...”
당황한 나머지 말이 꼬인다. 집까지 온다니. 그건 스바루군에게 미안한 일일 뿐만 아니라 더한 민폐를 끼치는 일이 된다. 그건 안 돼. 어디서, 어디서 보자고 하지. 안즈는 급한 마음에 지하철역 앞에서 보자고 말한다. 시내 쪽에서 만나면, 뭐든, 떠오르지 않아도 할 게 생길 테니까. 자신이 무슨 말을 내뱉는지도 모르는 채로 그렇게 말하고는 그래, 그럼 그렇게 하자. 라는 스바루의 답변을 들을 때까지 안즈는 금방이라도 발이 꺼질 것 같지만 부드럽게 흐르는 구름 위를 걷고 있는 기분을 차마 지우지 못했다. 그럼 이따가 봐. 그 말에서야 이리저리 꼬여버린 복잡한 상황을 머릿속에 차분하게 정리했지만 다소 산만한 사태를 만들었다는 걸 깨달았을 뿐. 그렇게 급하게 거절할 필요까지 있었나. 마치 집에 숨기면 안 될 무엇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안즈는 일정한 기계음이 흘러나오는 끊어진 전화를 보며 갑자기 이루 말할 수 없이 머쓱해진 기분을 느낀다. 그렇지만 뭔가, 부끄러워서. 뭐가 부끄러운 걸까. 글쎄? 이내 학교가 아닌 곳에서 그를 만나려면 지금 단정하게 차려 입은 교복이 아닌 다른 옷을 입는 게 맞다는 생각 때문에 더욱이 분주해져서, 그런 기분 같은 건 잠시 접어버리고 말았지만.
왜 부끄러웠을까. 친구라면 집 정도는 찾아와도 괜찮을 텐데.
*
옷을 고르고 고르다 약속시간에 또 늦어 버릴까봐 안즈는 결국 해결되지 않는 고민을 오래하지 못하고 그나마 제일 괜찮아 보이는 것 같은 옷을 골라 입고 왔다. 제 옷인데도 왜 이렇게 어색하지. 요즘 매일 하는 외출이라고는 다이키치의 산책이 전부여서 주말에도 교복을 입을 일뿐이었던 탓일까. 마치 남의 옷을 입은 사람처럼 뭔가 부자연스러운 동작으로 안즈는 지하철역 출구에서 자신을 만나기로 한 스바루를 찾아 찬찬히 시선을 두리번거려본다. 뭔가 스바루 군을 만나면 더 어색해져서 아무 말도 못 할 것 같기도 하고. 평소에 만나면 무슨 얘기를 했더라. 안녕, 스바루군. 그 다음에는? 그 다음에는, 무슨 말을 해야 너와 어색하지 않을 수 있지? 참으로 당연한 것들이 어색하게만 느껴지는 이 순간에 자신은, 무엇을 입으로 중얼여야. 안녕. 그 다음에는?
그 다음에는?
“전학생!”
너의 이름처럼 반짝거리는 목소리가 귀에 다가와 저를 간질인다. 아. 또렷하게 들리는 제 이름과 함께 공기 중으로 뿌려진 빛나는 가루를 쫓아가는 피터팬의 웬디처럼, 시선을 돌려 마주한 당신에게서는 원더랜드의 향이 나는 것만 같았어. 매일 보던 교복은 그에게서도 보이지 않았고, 그에게 참 잘 어울리는 옷으로 제게 부드럽게 웃으면서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스바루군. 안즈는, 제게로 가까워지는 그에게 닿일 듯 말 듯한 작은 목소리로 이름을 속삭였고 입술을 감추며 웃고 있는 그는 저와 한 걸음 정도 떨어진 거리에 우뚝 멈춰, 여느 때와 같이 살갑게 입꼬리를 올렸다. 뺨이 약간 발그레했음은 분주한 걸음으로 저를 찾아왔기 때문일까. 어딘가 보드랍게 웃는 그 표정이, 낯설다고 생각하면서 안즈는 그의 입이 다시금 열리기를 기다렸다. 저에게선, 더 이상 그에게 건넬 수 있는 말이 도저히 생각나질 않아서. 분주히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회색빛 소음 속에서 그 어떤 것도 귀에 들리지 않았음은 참으로 이상하게 여길 법한 일이다. 그리고 당신은 어째서, 입을 몇 번 달싹이기만 하는지.
“야호! 오래 기다렸어? 다이키치를 집에 달래고 오느라 말이야.”
조금 늦어버렸어. 당신의 말은 어째서인지 오늘, 조금씩 내려간다. 아니, 늦긴. 안즈는 그의 눈치를 살피며 가벼운 손짓으로 괜찮다는 부정의 의미를 표하고, 당신은 다시금 웃는 표정을 하고서 그저 저를 빤히 바라볼 뿐이다. 그럼, 어디 가기라도 할까? 전학생이 좋다면, 카페라도 좋아. 그 말을 끝으로 그는 안즈의 옆에 나란히 서고, 방금 보이던 한 발자국의 거리보다도 조금 더 가까이, 좁은 틈을 하고서 천천히 걷기 시작한다. 아까 엄청 졸렸나 봐. 전화해도 안 받고.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 늘 그러하듯, 당신의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전해오고 안즈는 그저 미안하다는 듯 어쩔 줄 몰라하자 스바루는 그런 안즈를 바라보며 웃기만 한다. 장난인 거 알지?
대신에 조금, 보고 싶긴 했어. 당신의 말은 사람들의 말소리에 자연스레 묻힌다. 처음부터, 안즈에게 들려줄 생각이 없었다는 것처럼. 작고 흐릿한 목소리로. 네 붉어진 얼굴이 보고 싶기는 하지만, 아직 제 마음을 온전히 드러내기에는 조금 망설여지니까. 스바루는 장난꾸러기처럼 웃으며 안즈와 눈을 맞추는 것으로 많은 것들을 대신하고, 들뜬 목소리로 다시금 말을 붙일 뿐이다. 사복 잘 어울리네, 전학생! 자신이 하고 싶은 많은 말들 중 하나만을 꺼내어 보이면서.
너를 좋아하는 걸까. 하고 생각하는 안즈에게로. 너에게 많은 것이 부끄러워지고, 당연스럽게 여겨지지 않는 반짝이는 아이 옆에 발을 나란히 하며 걷고 있는 소녀에게. 참으로 애타는 눈치게임이야. 누가 이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둘 다 먼저 1을 외치고 무승부가 되는 것도 좋을 거라고 생각해. 둘 다 우승자가 될 수 있는, 서로를 좋아한다고 알 수 있는. 언제부터 시작할지는, 네가 선택해 줘. 안즈. 나는 네가 원할 때 1을 외칠 테니까. 주머니에 넣어놓은 손이 간지러워. 스바루는 한 번, 제 손을 길게 폈다 다시금 주먹을 쥔다. 네게 닿고 싶어서.
자, 그럼 기다릴게. 우리 곧 재밌는 눈치게임을 하자. 서로를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 승자가 정해져있는 눈치게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