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바시엘]취기
그러니까 적당한 것은 무엇이든 나쁘지 않다고. 이는 그것이 어떠한 행위를 목적으로 삼든 적용되는 만국 공통어와 같은 명언이 아니었던가. 누군가는 몸에 좋지 않다며 손끝에도, 입술에도 일절 닿지 못하게 하는 담배나 술 같은 일종의 기호성 식품도, 적당하면 나쁠 것 없다는 말을 피해갈 수는 없는 것들인지라. 설령 인간의 몸에 해악을 끼친다 하더라도 어차피 한줌 흙으로 돌아갈 인생, 술 한 잔에 바로 죽을 정도로 약하게 설계되지는 않았다. 그리고 고단한 일 끝에 마시는 한 잔의 알싸한 술이 지친 몸의 어떤 감각을 일깨워주는지는 시엘 또한 모르지 않았기에 선명하게 투영되는 매끄러운 유리잔에 붉은 빛의 와인을 채우기를 여러 번. 하얗던 얼굴은 봄날에 점점이 꽃이 피어오르듯 분홍빛 기운으로 따스히 차올랐고 또렷하고 생기가 맑은 눈동자는 하루 종일 뛰어놀다 이제는 지쳐 잠을 청하고 싶어하는 순진무구한 어린아이마냥 소로록 잠길 것만 같다. 그러나 그 눈이 아직도 쉬지 않은 채 느릿하게 깜빡이고 있는 이유는 제 앞에서 끝나지 않은 작업들을 소리 하나 내지 않고 차분하게 처리하고 있는 히바리 때문이겠지. 어떠한 대화도 흐르지 않는 정적이 무겁다고 생각되지 않는 빤한 이유는 그것의 주체가 자신이 사랑하는 당신이라는 것 하나 때문. 당신의 무게 서린 얼굴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고 즐거움이 사그라들지 않음은 물론, 그 무엇도 거들어주고 있지 않으나 옆자리에 앉아 있는 것으로 수많은 업무들에게서 기인한 피로를 해소하고 있다는 티를 내는 당신이기에 종종 눈이 마주치면 너그러이 웃는 그 고운 모습에 오기를 부려서라도 졸린 눈을 감는 걸 참아보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묘하게 맴도는 무료함까지, 와인잔을 손 안에서 굴리는 것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기에. 당신을 놀리고 싶어지는 흔치 않은 기회를 잡아다 어떤 태도를 취하면 좋을지. 놀릴까. 말까.
사람은 취하면 이상하게도 이유를 알 수 없이 용감해지거나 무모해지지 않던가. 시엘은 길게 생각하지 않고 히바리의 얼굴을 빤히 보며 실실 나쁜 음모를 꾸미는 크리스마스 이브의 아이처럼 웃음을 감추지 못한다. 새로 딴 와인의 그윽한 향도 제 코를 마비시키듯 간지러이 맴돌아 저를 부추기는 데에 일조하고, 그런 저를 바라보는 당신의 눈은 이상한 낌새라도 읽어낸 듯 아까와는 다른 흔들리는 눈빛으로 제게서 한참이나 머물러 있음에. 마치 준비를 하듯 시엘은 와인으로 입술을 축이고 느릿하게 히바리의 곁으로 흐물흐물 다가가 흐흐, 기분 나쁜 웃음 소리를 숨기지 않고 내뱉으며 웃는다. 너는 몇 번, 그 단호한 눈을 깜빡일 뿐이고.
"히바리는~ 일이 남아서 이 좋은 와인도 못 마신데요~ 나는 벌써, 한 병이나 마셨는데에."
당신의 깊은 눈을 훤히 바라보면서, 시엘은 저도 모르게 늘어나는 말꼬리를 굳이 잘라내지 않고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신나게 히바리를 약올리기 시작한다. 일을 다 끝낸 사람에게 아직도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을 놀리는 것 만큼 사악한 일도 없지만, 즐거운 일도 또 없다. 하물며 평소에는 벽을 쌓아놓은 것처럼 빈틈 하나 찰나라도 보여주지 않는 당신이라면 더욱이. 당신은 이게 무슨 짓이냐는 듯, 함박 웃음을 지은 저를 바라보며 얼굴을 약간 구기었으며, 조금만 더 건드리면 아무리 시엘이라고 할지라도 날카로이 물어버릴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아, 그런데 어쩌지. 무서워서 그만둬야겠다는 생각은 커녕, 너무 재미있다. 시엘은 여전히 헤헤, 웃고 남은 와인을 전부 입속에 들이 부으며 당신의 허락 하나 구하지 않은 채 일을 방해할 작정으로 그 익숙한 감각의 무릎에 털썩 주저앉아 소리내어 웃어본다. 시엘. 뭐하는 짓이지? 당신의 목소리에는 확연한 노가 담기어 있었고 눈빛은 조금 열이 올라있다. 이제는 슬 그만두는 게 정말 좋을 것 같은데. 서류를 들고서 어디에 두어야 좋을지 모르는 헤매이는 당신의 손을 보고 있자니 어찌도 이리. 욕망은 사그라들지 않고 타오르는가. 마지막,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입술은 조용히 움직이고.
와인도 못 마시는 히바리 쿄야. 불쌍해서 어떡해. 와인도 못 마시는데 일까지 하고 있어서 불쌍해서 어떡해. 헤헤헤. 당신이 더 이상 참지 못할 것을 알았기에. 책상에 서류를 던지고 저를 들어올린 것도 썩 놀랍지 않은 일이다. 사실 취기에 당신이 뭘 하든 무섭지는 않고 되려 재미있는 걸지도 모른다. 빨리 자. 당신은 거의 눈이 감겨지는 저를 침대에 고이 뉘여놓고 멀어져가는 의식과 함께 꾹 누르고 있는 목소리를 하나 남기고 걸음을 옮긴다. 내일, 진탕 혼나겠다...
참으로 답지 않게 밉살스레 군다고. 그러면서 동시에 차마 미워할 수가 없다고. 히바리는 괜히 죄없는 하얗고 빽빽한 서류 더미에 화풀이를 하듯 눈을 흘기며 머리를 작게 쓸어넘긴다. 작은 한숨과 함께 뒤로 기울인 몸은 피로하다고 곳곳에서 외치고 있는데. 열받아. 아직 가라앉지 않은 분에 히바리는 울분을 토해내며 눈가를 작게 누른다. 이 밀려버린 어마어마한 서류들에 그저 너를 빨리 재우는 것밖에는 하지 못한 것이 또 무게를 더하여 되돌아온다. 아. 정말로. 히바리는 몸을 다시금 일으키고 손을 뻗어 서류들을 붙잡고 단단히 맹세한다. 오늘 밤을 꼴딱 새서라도 이 일들을 전부 끝장내고서 내일 네가 눈을 뜨자마자 잔소리부터 실컷 퍼부어줄 것이라고. 그리고 일하는 네 앞에서, 청주를 병째로라도 마셔줄 테니.
한 번만 더, 골탕 먹여보라고. 나쁘지만은 않았으니 딱 한 번만 더. 일은 끝이 보이질 않는데 이상하게도 웃음이 났다. 당신의 와인 향에 취기라도 올랐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