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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안]사과 한 조각

無下 2019. 3. 9. 23:54

당장 몇 초 후에 일어날 일도 모르는 것이 인생이라 말했다. 산을 잡아먹은 불이 태어난 장소가 딱딱한 구둣발로 밟으면 일렁이지도 못하고 꺼졌을 좁쌀만한 불씨 하나였던 것처럼, 가시가 될 말들만 골라 치부를 향해 찔러 넣고, 서로의 목을 조르지 못해 안달이 난 일련의 난폭한 행위는 으레 누군가의 침묵 한 스푼이었으면 아무런 맛도 느끼지 못하고 넘어갔을지 모르는 사소한 행위에서 불발하기 마련이다. 비 온 뒤에 땅이 굳어진다고 관계라는 울타리 사이에서 어찌 망치질 한 번 하지 않고 평생을 할 수 있겠느냐마는, 날카롭다 못해 숨 막히기까지 한 지금의 분위기가 안젤라에게 거슬리지 않고 썰물 때의 고요한 바다처럼 조용히 빠져나갈 수 있을 리는 없었다.

고쿠데라와 싸웠다. 사실 불이 휩쓸고 지나가 폐허가 되어버린 회색빛 전장을 둘러보고 있자니 무엇이 저들을 이렇게 파국으로 치닫게 만들었는지 정작 찾아내질 못하겠다. 안젤라는 일종의 화풀이로 제 옆에 놓인 토끼 인형의 귀를 손가락으로 튕기며 짜증을 부린다. 누가 먼저 잘못했든 말든, 이제 그런 것은 크게 중요하지 않으나. 아니, 솔직히 말하면 사과의 시작을 누가 베어 무느냐가 중요하니까 그런 시시비비를 치졸하게 따지는 것도 나름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어찌되었건 고쿠데라의 그 높디 높은 자존심에 자신 또한 먼저 자존심을 바싹 말라버린 나뭇가지처럼 간단하게 꺾어 버리고서 사과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것도 한 두 번이지, 그놈의 자존심으로 매일 전쟁 치루듯 눈치싸움 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닌 것을. 그러나 참으로 지독하게도 그를 좋아하는 것은 너무 오랫동안 지속해 온 습관과도 같은 끈질긴 감정이어서 안젤라는 그에게 연락하고 싶은 마음을 품고 몇 번이나 휴대폰을 들었다 놨음을 스스로에게 고해해야만 했다. 그냥 얼른 서로에게 잘못했음을 사과하고 나면 그 뒤의 일은 아무 노력도 하지 않아도 엉킴 하나 없는 실타래처럼 금방 풀릴 건데. 사람들은 오히려 너무 단순한 일을 해내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에라, 모르겠다. 어차피 지금 풀리지 않은 일을 해결도 할 생각 안 하고 머리만 싸매고 있으면 무엇하리. 안젤라는 침대에 힘없이 눕고, 하루와 쿄코에게서 온 메일에 하나씩 답을 하기 시작한다.

메일의 이유는 평범함. 다들 시간이 괜찮아진 것 같으니 모두 어딘가 놀러가는 게 어떻겠냐는 아이들의 권유. 안젤라는 거절해야 할 이유가 없었고, 거절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친구들과 어딘가에 놀러가는 건 또 처음인지라 꼭 같이 재미있는 일을 함께하고 싶었으니까. 아이들이 전해준 바로는, 츠나도 함께 하기로 해서 고쿠데라가 적극적으로 열을 올리며 십 대째가 함께하는 곳이면 어디든 가겠다고 분명한 긍정의 표시를 보였다 했다. 고쿠데라가 아직 얄미운 것은 사실이지만, 같이 놀고 싶은 마음도 걷잡을 수 없이 컸기에 안젤라 또한 이런 상황에서도 망설임 없이 놀러가겠다 이야기 한 거였다. 물론 꼭 고쿠데라가 아니었어도 재미있게 놀고 싶다 생각했겠지만, 고쿠데라가 있다면 꼭 가고 싶으니까. 안젤라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좋다며 답장을 보내고 피로가 전부 풀린 것처럼 반 바퀴를 굴러 푹신한 베개에 얼굴을 폭 파묻는다. 놀러 가면 쌓였던 것들을 전부 물에 풀어내야지. 아이들이랑 같이 이야기하다 보면, 서운한 감정 같은 것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사라져버릴 거라고. 안젤라는 금방 자신이 미워했던 토끼 인형을 꼭 끌어안고 들뜬 마음을 어찌할 줄 몰랐다.

그렇게 엄청 마음이 구름처럼 동동 떠서 가벼운 발걸음을 재촉했는데, 이게 웬일. 겨우 둘만 덩그러니 남겨지는 일은 상상조차도 하지 못했던 일인데. 고쿠데라는 분명하게 어색하다는 눈을 하고서 다소 쭈뼛거리는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먼 산만 바라보며 우두커니 서 있다. 그러니까 이게 어찌 된 일이냐고 물어본다면, 갑작스럽게 일이 생겼다는 아이들의 사과. 고쿠데라를 제외하고선 모두들 자리에 나오지 못한 거였다. 이걸 어쩌지. 평소였다면 그저 아무렇지 않게 달가워하며 둘이서라도 재미있게 놀자 밝은 기색으로 고쿠데라를 귀찮게 만들었을 텐데. 지금은 이어지는 침묵 속에서 무어라 말을 먼저 꺼내는 것이 좋을지도 쉬이 짐작가질 않는다. 다 같이 놀지 못하는 건 아쉽지만, 솔직하게 말해서 단 둘이 시간을 보내는 것도 싫지는 않은데. 안젤라는 짧은 고민을 곱씹고선, 흠흠, 조그마한 헛기침을 하곤 제게서 시선을 피하고 있는 고쿠데라에게 한 걸음 다가간다. 고쿠데라군. 약간은 샐쭉한 표정으로 결국은 자신과 눈을 마주해주는 당신을 보며 생각한다. 기회는 생겼을 때 잡는 것. 어쩌면 너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자연스럽게 전하고 제게 쌓인 것들을 없애버릴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전처럼 너에게 아무렇지 않게 다가가 웃을 수 있는 일을 해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안젤라는 웃었고 그도 안젤라의 누그러진 목소리를 듣고선 머쓱해진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다 걸음을 돌린다. 됐고, 가자. 당신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걷지만, 자신에게서 한 걸음 이상 멀어지지 않을 정도의 걸음으로 앞서 걸어간다. 오늘은 네 앞에 앞서지 말아야지. 많은 것을 뒤로 하고서 네게 꼭 진솔하게 사과하고 싶다고. 제게 존재하지 않은 너무 많은 것들을 사랑하게 만든 당신에게.

고쿠데라군, 우리 그럼 쇼핑이라도 하러 갈까요? 안젤라는 성큼, 그 한 걸음의 간격을 뛰어넘고서 자연스럽게 그의 팔짱을 끼며 묻는다. 움찔하는 제스쳐와 제 팔로 느껴지는 뻣뻣해지는 근육의 감각. 안젤라는 그 모습이 짓궂게도 재미있어 소리 죽여 웃었고, 고쿠데라는 제게 시선 한 번 주지 못한 채 그저 서둘러 걸었다. 우리가 이만큼 커버렸다면 이제는 익숙해질 법도 한데. 당황해서 굳어버리는 그의 모습을 볼 때마다 간지러워지는 자신도 아직 그 사랑스러운 감각에 익숙해지지 않았으니 그리 말할 것은 아닌가. 사실 앞으로 더, 이렇게 놀란 표정을 지어주면 좋을 텐데. 사실 그 어떤 표정이라도 자신에게는 마냥 좋기만 하겠지만.

싫지는 않은 듯, 멈칫거리는 기색 없이 저와 걸음을 같이 맞추는.

 

이거 어때요?”

안젤라는 눈에 들었던 옷들을 이리저리 들어 보이며 고쿠데라에게 들뜬 목소리로 묻는다. 무엇인가 지루한 듯, 뚱한 시선으로 옷에 얄팍한 시선을 한 번 흘끗 주었다가 그는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답한다.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인데.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 안젤라는 그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아 입을 비죽이며 소리 없이 고쿠데라를 노려보곤 옷걸이를 다시금 걸었다 들기를 반복한다. 예쁜데. 차마 포기하기에는 너무 아까운 탓에 안젤라는 옷을 제 위에 걸치듯 가져오며 깨끗하게 반짝이는 거울을 한 번 유심히 바라본다. 괜히 심술을 부리는 건지, 아니면 진짜로 별로인 건지. 안젤라는 한 번 부루퉁한 입술을 하고선 다른 옷을 꺼내본다. 이것도 예쁜데. 사실 고쿠데라가 제가 고른 것에 대해 어떤 불만을 표하든, 자신의 선택에 흔들리지 않는 안젤라는 그 옷을 내려놓지 않을 것이다. 다만, 고쿠데라를 만나러 갈 때는 다른 옷을 입고 길을 나갈 테지만. 안젤라는 형형색색의 옷에 신경을 쏟아부으며 스타카토마냥 손가락을 옷걸이에 톡톡 두드린다. 뭐가 좋지. 안젤라는 결국 처음에 골랐던 옷 하나와, 고쿠데라에게 의견을 묻지 않고 고른 옷 하나를 들어 계산한다.

, 잠깐만. 안젤라는 계산대에 선 채로 고개를 돌려 고쿠데라와 한 번 눈을 마주했다가, 가판대로 다가가 후에 고른 옷과 똑같은 옷을 하나 더 골라와 계산대에 올려 따로 포장해달라 말한다. 약간 알 수 없는 웃음을 지은 것이 마음에 걸리는 고쿠데라는, 몇 초 지나지 않아 제 불길한 느낌이 틀리지 않았음을 체감한다.

이거 커플티예요! 안젤라는 제 옷과 따로 담겨있는 쇼핑백을 고쿠데라에게 내밀며 환하게 말한다. 당연히 거절당할 것을 알면서도, 괜스레 한 번 제안해보고 싶었던. 사실 제게 이런 물건들에 담긴 의미는 그리 크지 않다. 어차피 그는 약혼자이고 이런 일종의 형식을 해보지 않아도 자신과 연인사이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으니까. 그런데 이유 없이 한 번쯤 불어오는 충동과도 같은 거 있잖아. 질린 표정의 고쿠데라는 싱글벙글 웃고 있는 안젤라의 앞에서 결국 이겨내지 못하고 쇼핑백을 손에 쥐고 걷는다. 사실 입어줄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으나, 아니, 입어주면 정말로 좋겠지만.

당신이 쇼핑백 사이로 비치는 옷에 흘끗하는 작은 시선을 주는 것만으로도 기분은 썩 나쁘지 않아서.

 

안젤라는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며 제 옆에 있는 고쿠데라를 옆눈으로 슬쩍 보다 시선을 다시 제자리에 위치한다. 뭔가 꼭 사과를 하고 싶다고 마음 먹었으나, 정작 지금 그러기에는 알맞은 타이밍도 아닌 것 같고. 도로 위를 분주히 지나가는 차들을 아무 의미 없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고쿠데라는 지금 무슨 생각일까. 그날의 싸움에 어떤 의미를 두고 있을까. 제 사과를 기다리고 있을까, 아니면 너도 나처럼, 사과를 입에 올리기 위해 내색하지 않지만 사실 전전긍긍하고 있을까. 아니면 그냥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그저 한낱 밤의 나쁜 악몽이었던 것처럼 그저 기억 속에서 조용히 지워버렸을까. 그리 좋은 일은 아니었다 해도, 나는 네가 그 모든 것에 대해 무감각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는데. 어쩌면 제 잘못에서 시작했을지도 모르는 그 일들을 암묵적으로 덮어버리고 싶지는 않아서. 안젤라는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연다. 고쿠데라군.

신호 바뀌었다. 고쿠데라는 마치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듣지 못한 것처럼, 그 간단한 말 한 마디를 던지고서 횡단보도의 첫 하양을 밟아 걷는다. 사과하는 것은 참으로 무거운 일이라지만, 이렇게 입을 떼는 것조차 어려워지면. 안젤라는 다시금 입술을 모으고, 고쿠데라를 따라 걸어나간다. 오늘이 가기 전에는 꼭, 꼭 미안하다고 이야기 할 거니까. 괜찮을 거라고. 마치 자신을 재촉하는 것처럼 신호등은 규칙적으로 깜빡이고.

고쿠데라군. 저희 게임이나 하러 갈까요? 사과의 말을 꺼내는 대신, 안젤라는 횡단보도를 다 건너오자 보이는 게임센터를 보며 밝은 목소리로 묻는다. 승부를 가리는 거라면 그도 퍽 좋아하는 것이니까. 고쿠데라 또한 나쁘지 않은지 그러든지, 짧은 대답을 건네고 게임센터로 향한다.

총 게임도 있잖아?”

현란하게 화면을 장악한 게임기들을 둘러보던 안젤라는 FPS게임 하나를 발견하고선 반가운 친구를 만난 것처럼 목소리를 높이며 다가간다. 안젤라가 자신있어하는 즐거운 종목. 고개를 돌리자 다른 게임기들을 구경하는 고쿠데라를 부르고 안젤라는 동전들을 꺼낸다. 고쿠데라군, 총게임 해요.

대신 이기는 사람이 이따 젤라또 사주기. 안젤라는 게임기 앞에 비치되어 있는 플라스틱 모형의 총을 들고선 자신만만하게 고쿠데라에게 제안한다. 종목이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펜싱까지 섭렵한 안젤라에게 승부는 까맣게 물든 어둠 속에서 피어오른 불을 보듯 훤한 일. 안젤라는 의기양양하게 이미 이겼다는 눈치로 웃고, 고쿠데라는 그런 안젤라의 당당한 표정이 마뜩찮은 듯 따라 총 모형을 손에 든다. 지고 나서 후회하지나 마라. 다른 이들이 듣기에는 다소 무섭다고 느꼈을지도 모르는 날카로움이다마는, 안젤라에게는 그저 고양이 한 마리가 잠자는 것을 방해했다는 이유로 가소로운 성질을 부리는 정도의 앙증맞음으로 느껴져 속으로 소리 없이 웃는다. 게다가 자신이 질 것 같지도 않고. 동전이 기분 좋게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화면에는 퍽 익숙한 레퍼토리의 주인공이 나와 긴급한 상황임을 알리고, 둘은 한 마디 대화도 없이 바싹 집중한다.

격한 소리가 한참이나 들리길, 결과는 예상했던 대로 안젤라의 완승. 고쿠데라는 어이가 없는 듯 약간 얼떨떨한 표정으로 게임기의 스크린을 바라보며 눈을 깜빡이고, 안젤라는 간지럽게 후후 웃으며 총을 시원스레 내려놓는다. 오랜만에 고쿠데라 군의 코를 납작하게 눌러준 것 같아 뿌듯한 기분에 마음껏 행복해하면서, 안젤라는 콧노래를 부르며 게임 센터를 빠져나온다. 제가 이겼으니까, 고쿠데라 군이 젤라또 사줘야 해요. , 신난다. 겨우 게임 하나로 이렇게 신이 날 줄은. 안젤라는 피스타치오 젤라또를 머릿속에 그리며 종종걸음하고, 고쿠데라는 안젤라의 뒷모습과 게임 화면을 한 번 번갈아보곤 허, 한 번 숨을 내뱉는다. 이게 뭐람. 펜싱에 도가 튼 줄은 알았지만 총까지 이런 식으로 다룰 줄은. 집안을 생각하면 이상할 게 없는 건가, 싶다가도.

! 고쿠데라는 안젤라가 더 멀어지기 전에 발을 재촉하여 분주히 게임센터를 빠져나간다. 썩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불쾌하지는 않은 패배다.

 

둘은 주변에서 유명하다 하는 가게에서 젤라또를 사다 근처 공원 벤치에 자리를 잡고 잠시 휴식을 취한다. 그리 많은 곳을 돌아다니지는 않은 것 같은데 왜 쉬이 지치는지. 평소에는 생기지도 않았던 묘한 긴장감 때문인지는 몰라도, 안젤라는 다시금 찾아온 침묵의 간극에 미안함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며 눈을 깜빡인다. 지금 말할까. 이 젤라또가 전부 녹아버리기 전에. 어떻게 미안하다고 말하지? 그냥, 미안해요. 그렇게 이야기할까.

. 십대가 여기 계셨어야 하는 건데. 안젤라의 입이 열리기 전에 먼저, 얼떨결에 안젤라를 따라 사게 된 바닐라맛 젤라또를 작은 분홍빛 스푼으로 아무렇게나 찔러 넣으며 고쿠데라는 중얼인다. 이제는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익숙해진 십대라는 호칭에 안젤라는 햇빛에 투명하게 빛을 내는 물색 눈동자를 도르르 굴려다 시선 한 조각을 고쿠데라에게 살포시 얹는다. 도대체 무엇이 한 부분도 풍화되지 않을 그를 그리도 맹목적으로 만들었는지 참으로 놀라워서, 그의 입에서 저런 말들이 쏟아져 나올 때는 항상 모든 것을 앗아다 의문을 가지게 된다. 뭔가 미궁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처럼, 그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다 자신하고 있었는데 자리를 잘못 찾아 앉은 사람이 되어버린 기분으로. 뭔가 조금은, 아쉬운 기분도 생겨나는 것은 댐에 생겨난 구멍처럼 막을 방법도 없고. 안젤라는 괜스레 아무 잘못 없는 스푼을 꼼지락거리며 젤라또를 약하게 휘젓고, 생각의 덩어리를 휘저어 솜사탕과 같은 사념들을 만들어낸다. 작은 바람 한 번 불어버리면 구멍이 나 버릴 약한 것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달콤한.

내가 최우선이 아님에도 나는 너의 곁에 남아있고 싶어. 자신이 아닌 타인에게 모든 것을 기꺼이 바칠 준비가 되어 있는 네 옆에. 내가 십대와 같은 존재로 너에게 각인될 수는 없겠지만, 바위에 새길 수 없다고 해서 온전히 흔적을 남길 수 없는 것은 아니니까. 파도로 인해 사라지는 모래의 발자국일지라도, 그것을 매일 남기고 있으면 자국은 언젠가 남아있을 테니까. 너의 그 견고한 세상에 작은 발자국 하나 남기는 사람 정도는 되어도 좋겠지.

젤라또 녹는다. 컵을 쥔 안젤라의 손에 그의 손이 잠깐 닿는다. 작게 방울진 젤라또가 제 손 대신 고쿠데라의 손가락에 옮겨지고, 안젤라는 솜사탕에서 빠져나와 컵을 재차 고쳐 잡는다. 헛생각 하지 말고 빨리 먹지?

고쿠데라 군이 뭘 알아요. 베에. 사과인사 대신, 혀를 내민 안젤라는 급히 스푼을 만지며 웃는다.

나는 정말로, 네가 좋은 것 같아. 그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너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들어가라.”

오늘 재미있었어요, 고쿠데라군. 다음엔 애들이랑도 같이 놀자구요.”

십대도 꼭 불러서. 날은 어느덧 저물었고, 가지 않을 것 같던 시간은 신기하게도 잡을 틈도 없이 빠르게 흘러 도착했다. 십대가 오신다면 당연히 와야지. 당연한 걸. 고쿠데라는 십대라는 단어에 열을 올려 이야기하고, 안젤라는 그의 반응에 간지러운 듯 웃는다. 그래, 그래. 괜한 걸 물어봤다. 잘 가. 안젤라는 손가락을 움직여 그에게 가볍게 작별 인사를 고하고, 고쿠데라는 아무 말 없이 그저 몸을 돌려 귀로를 거닌다. 나는, 아직 너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못했는데. 너를 위해 지었던 웃음은 비가 내린 눈처럼 아무렇지 않게 녹아버리고, 손은 힘없이 아래로 떨어진다.

결국 오늘 너에게 사과하지 못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닌 쉽고도 당연한 일을. 우리 사이가 막역하다고 해서 모든 것들이 없어도 좋은 것은 아닌데. 어쩌면 너도 내 사과를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라고.

너무 당연한 너라서 나는 더 소중히 해야 할 것을. 안젤라는 고쿠데라가 사라질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언젠가는 너에게 말해야지. 나는 너를 참 많이 좋아하고, 당연하다고 여기고 있지 않다고.

미안해. 고쿠데라. 이제는 무엇이 기분 나빴었는지도 모를, 알 수 없는 사과 한 조각은 허공을 떠돌다 연기처럼 흩어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