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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가하나]석류 한 알

無下 2019. 5. 19. 16:46

석류 한 알의 무게를 알고 있나요.


당신의 눈은 선명한 피를 닮아 숨길 수 없는 붉은 색이다. 탁한 어둠 하나 섞이지 않고 빛 아래에서 더욱 영롱하게 맑은, 그 누구든 한 번쯤 마주하면 당연히 매혹당해 시선을 돌리지 못할 눈. 하나는 그의 외모에 있어서는 한 번 부정이라는 것을 해 본 적이 없긴 하나, 길가메쉬의 눈을 묘사하는 데에 있어서는 특히나 공을 들일 만큼 그 빨간 눈을 마음에 들어 했다. 사람들을 홀리게 하는 그 눈이 잘못한 거라고. 어떻게 보면 매우 글렀다 할 수 있는, 묘한 화법을 속으로 중얼거리며 하나는 제 앞에서 신화를 기록해놓은 책을 읽고 있는 길가메쉬를 바라본다.


하데스와 페르세포네의 이야기를 아느냐. 당신을 두고 떠난 인리수복동안, 당신은 또 어떤 새롭고 흥미로운 지식을 탐하였기에. 칼데아에 지친 기색으로 돌아온 제게 흔한 안부 하나 묻지 않고 호기심을 충족하고자 당신은 물었다. 아니, 어쩌면 이미 알고 있으면서 제게 시험하고자 물어보는 것일지도 모르지. 당신은 항상 지식을 갈구하면서도 한낱 인간에게서 이상적인 것들을 추구할 만큼 낮은 위치에 존재하지 않으니까. 그런데 갑자기 그네들의 이야기는 왜. 불쌍하게도 하데스에게 속아 석류 한 알을 먹었을 뿐인 가련한 페르세포네. 자신의 어머니가 존속하는 땅이라는 곳에 다시는 발 한 번 들일 수 없게 된 안타깝고도 원망스러운 이야기. 하나는 피로에 젖었으나 분명한 목소리로 알고 있다 답한다. 얼마나 유명한 이야기인데요. 나를 너무 낮잡아 보는 거 아니에요? 마치 그를 놀리듯 하나는 가벼운 농담조의 말을 던졌고 길가메쉬는 이내 책을 덮은 후 무심한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그렇다면 너는 석류를 권해도 먹지 않겠군. 삐딱하게 턱을 괸 채 올려다보는 모습에는 말과 달리 일말의 아쉬움 하나 없다. 저를 한 번 건드려보고자 할 때 짓는 그 특유의 고고한 표정. , 저럴 때면 정말 어떻게 해서든 이기고 싶단 말이야. 저를 무시하는 것이야, 늘 있는 일이긴 하지만 지금 같은 경우는 그저 단순히 자신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 결국 제 손 안에서 뛰는 것밖에 안 된다는 의미를 암시하는 것만 같아 꼭 이겨버리고 싶다. 석류. 당신 말의 의미는 내가 당신의 세계에 절대로 얽매이지 않을 것이라는 게 담겨있는 것이겠지. 이미 그것이 지옥으로 향하는 걸음임을 알고 있는 자가 아무렇지도 않게 하데스가 건네는 석류를 베어 물어 줄 리가 없으니.


그런데 내 지옥이 당신이라는 말이 빠졌잖아요. 하나는 느릿하니 다가가 당신의 무릎에 앉고선 미소 짓는다. 내가 석류를 먹어주지 않을까 봐 두렵기라도 한가 보죠? 내가 그 새빨간 석류를 입에 넣어서 얻는 것이 당신이 존재하는 지옥이라면 한 알로 끝나는 게 아니라 전부 삼켜줄 수도 있어요. 어쩌면 당신의 그 붉고 차가운 눈까지도 삼켜줄 수 있는데. 여전히 웃고 있는 당신의 뺨을 쓸어내리며 하나는 낮게 읊조리고, 흘러내리는 머리칼을 방치한 채 당신의 눈등 위로 가볍게 입 맞춘다. 그러니 조심해요. 내가 당신에게 영원히 갇히고 싶어서 언제 그 눈을 삼켜버릴지 모르는 일이니까.


석류 한 알의 무게를 알고 있나요. 그것은 내가 당신에게 바칠 피가 흥건한 새빨간 심장과도 같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