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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쿠렌호]무언의 감정

그곳에서 마주칠 거라곤 생각도 못한 존재라고, 스쿠알로는 그날을 회상하며 곧잘 이리 말하곤 했다. 이런 지저분한 곳에서 일하기에는 너무 순진해보이는 아이었으니까. 처음부터, 그 아이를 눈에 담은 순간부터 머릿속은 사고회로가 정지한 사람마냥 물음표를 가득 띄우는 일밖에 하지 못했던 거다. 저들에게 반기를 들며 도망치기 바빴던 이들의 머리를 날려버리는 데에 정신이 없던 와중에 어째서 그리도 뚜렷하게 눈에 들어와 저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는지. 회색빛 전장에서 너는 마치 만개한 벚꽃나무와도 같았다. 이질감이 가득한, 그러나 그림에서 그걸 지워버리고 싶지는 않은. 모든 것을 베어버리는 데에 익숙한 자신이 처음으로 칼을 거두어버리고 싶다 생각하도록 만든 존재였다. 너는 분명 다른 이들과 같이 죽음을 두려워하면서 떨고 있는 하나의 인간일 뿐이었는데 어째서 칼날을 목에 가져가고 싶지 않았는지. 제게 그런 인간들을 죽이는 일은 손가락 한 번 움직이는 일보다 쉬운 일이었는데. 네게는 유일하게 망설임이라는 것을 품었다. 그래서 살아있는 모든 것을 죽이라는 잔저스의 명에도 불구하고 너를 데려가겠다 억지를 부린 것이겠지. 마치 그 아이를 죽일 것처럼 노려보는 눈빛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하지만 그곳에서 너를 죽이면 영원히 돌이킬 수 없을, 하데스 강을 건너버린 기분을 느끼고 참담해질 것만 같아서.

네게 품은 감정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연민? 동정? 무엇이라고 정의내리는 것이 항상 시원스러운 결정을 내리는 제게 상당히 오랜 시간을 잡아먹은 고민이었다. 애초에 처음부터 너를 보았을 때 심장이 저 아래로 추락하는, 그러나 그 감각이 나쁘지 않았음을 네게 고한다면 무어라고 정의내릴까. 그러나 실제로 입을 열어 그 감정이 무엇인지 제게 알려달라 네게 말하지는 않았다. 그게 만약 한낱 불쌍함에서 기인된 감정이라면 네게 물었을 때 상처를 주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서지 않았던 탓이다. 말은 제 날이 잘 선 칼보다 더 무서운 존재로 비수를 꽂기도 하는 법 아니던가. 그저 썩 나쁘지 않은 감정이라고 생각하다가도 쉬이 말하고 싶을 정도의 확신은 서지 않았던 탓이다. 네 얼굴을 마주하고 있으면 괜스레 웃음이 새어나오고 조금이라도 날이 덜 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건네고 싶다는, 그런 바람이 피어오르기는 했으나 그것들은 안타깝게도 제게 익숙치 않았던 탓에 어떠한 이유로 네게 이리 행동하는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거였다. 아직 이곳에도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눈치를 보고 있는 네게 품은 감정이라서, 더더욱 섣불리 하고 싶지 않았고.

그나마 다행이라 하고 시은 것은 너는 그 특유의 좋은 성격 탓인지, 꽤나 빨리 본부 생활에 익숙해지는 듯했다. 룻스리아와도 말을 잘 섞었으며, 나쁘지 않은 친구를 만든 것처럼 지냈고, 다른 놈들의 장난도 썩 잘 받아주며 어울리는 듯했다-보스는 탐탁치 않아하는 눈빛을 매냥 하고 있었으나-. 더하여 자신도, 잘 지내느냐며 스쿠알로가 이따금 지나가는 말로 물어볼 때면, 그 하얀 볼을 잔잔한 분홍빛으로 물들이며 스쿠알로 씨 덕분에, 잘 지내고 있어요. 그런 말을 제게 보답마냥 들려주곤 했다. 그럴 때마다 심장이 견디지 못하게 간지러운 것은 매 부정할 수 없는 일이었고, 스쿠알로는 실없는 소리를 잘한다며 황급히 자리를 뜨는 것으로 복도를 울릴 것 같은 심장소리를 감추고는 했다. 뭐지? 수많은 이를 찌르고 베어낼 때나 느끼던 핏빛으로 흥분된 심장박동이 왜 그런 평화로운 순간에 쓸데없이 뛰어 저를 놀라게 만드는지 알 길이 없었다.

이건 뭐지?

매일 같이 칼을 닦아 마음을 비우는 밤이 되어서도 네 생각이 예고없이 침범하는 일이 잦았다. 그럴 때면 스스로 짐짓 놀라 칼을 쓸던 손을 멈추고 화끈거리는 얼굴을 손등으로 더듬으며 호흡을 진정하려 애썼다. 몸이 통 좋지 않은 건가? 네가 온 뒤로 얼굴에서 석류알 같은 붉은기가 사라질 기미가 보이질 않으니.

스쿠알로는 칼을 정돈하여 놓고 퍽 깊은 생각에 빠지기로 한다. 네 생각이 나면 전염병마냥 저도 모르게 얕은 입꼬리가 올라가곤 했다. 웃는 일은 썩 괜찮은 일임에 틀림없었다. 그것도 네 웃는 모습과 간간히 잠식하는 생각에서 기인하는 것이라면 자신이 렌호에게 품은 감정은 호의적인 것임에는 틀림없을 텐데- 아직도 명명하지 못한다. 겨우 하나의 감정에.

심지어 네가 떠나겠다 처음 말을 꺼낸 순간까지도.

스쿠알로 씨. 이제 일본으로 돌아갈까해요. 너는 마음을 굳히듯 제게 그리 말했다. 네가 만들어준 차를 손에 엎질렀음에도 불구하고 뜨겁다 느끼지 못할 정도로 아찔한 고백이었다. 어디로 돌아가? 정착지가 어디든 이곳을 떠난다는 말과 일맥상통. 당황한 렌호가 제 손을 잡아 얼음을 대어 줄 때까지, 머리는 복잡함으로 가득 차 제대로 된 사고회로를 돌아가지 못하게 만든다.

? 지금 돌아가서 뭘 어떻게 하겠다고. 어떨 때 행동은 생각보다도 빠르다. 어떻게든 붙잡아야겠다고 생각해버린 탓에 홧김에 저지르듯 내뱉은 말은 꽤 날카로운 칼처럼 날아가 네게 닿았다. 지금 일본에 갔다가 다시 납치되면 어떡하려고 그래? 여기 있는 게 더 나을 거 아니야. 우오이. 이봐, . 생각 잘 해보란 말이야. 엉성하게 단어별로 떨어져 나가버린 문장들. 렌호도 당황한, 놀란 기색을 숨길 새 없이 드러내었고 시간이 지나 자신이 토로한 말들을 되새긴 스스로도 놀라 눈만 끔뻑거렸다. 불온전한 침묵이 잠시. 제 걱정해주셔서 감사드려요, 스쿠알로 씨. 그럼 며칠만 더 있다가, 가보도록 할게요. 그렇지 않아도 요즘 한창, 갱단이 날뛰는 때니까... 너는 말끝을 흐리며 시선을 아래로 거두곤 겨우 웃으며 그리 답했다. 어색함을 뒤로 하고, 손에 연고를 발라주겠다는 너조차 뒤로 하고 방으로 곧장 달려와 벽을 타고 미끄러진다. 방금 무슨 만행을. 화끈거리는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방금의 행동에 후회를 싣고서 짧은 탄식을 흘린다.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말한 것인지. 근데 이 감정을 네게 고하고 이름 붙여주기 전에는 너를 떠나보내고 싶지 않았다. 결단코, 꼭 붙잡고 네게 말하고 싶었다. 어째서? 그야 네게 품은 감정이라서. 그것이 좋은 것이라면 꼭 네게 말하고만 싶었다. 그래서 그렇게, 억지로 붙잡고.

며칠. 너는 확실한 수가 정해지지 않은, 길지 않은 며칠의 유예기간을 주었다. 하지만 단 수십시의 시간으로 이를 형용할 수 있었으면 진즉에 너에게 말할 수 있었겠지. 네가 떠나겠다 하는 시간은, 갱단을 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돌아왔고, 허락을 구하기라도 하듯 스쿠알로를 찾아와 문너머에서 빼꼼히 얼굴을 비추었다. 스쿠알로 씨. 네 입에서 떨어질 말이 무엇인지 너무나도 선명하게 알았기에, 그는 또 무서운 말로 윽박질렀다. 아직 갱단을 친 지 얼마나 됐다고 그래. 돌아가면 위험해 질 거 알잖아. 그럼 너는, 또 어떤 반박도 못하고 눈만 깜빡거리다 곧장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서 알겠다며 돌아가곤 했다. 바보같이, 그냥 몰래 가버려도 될 것을 왜 항상 제게 와서 얼굴을 보이고 가는지. 그러지 않은 편이 제게는 물론 좋은 것이었지만, 스쿠알로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꾹 손가락 끝으로 눌러댄다. 다음에는 또, 무어라 하지. 네 물기서린 눈을 볼 용기가 없는데.

그래. 원하는 것은 오래 가지 않는다. 아마도 네가, 다섯 번째로 이제 돌아가겠다고 말했을 때였을 것이다. 제게서 알겠다는 말을 들으리라 기대하지는 않는 눈치였으나 이번엔 물기가 아니라 조금 지친 기색이 물들어있는 목소리에 스쿠알로는 잠깐 입을 열었다가 다문다. 자신이 잡아도 되는가. 하지만 이대로 간다고 하면 자신은 또 붙잡을 것이 선히 보인다. 이제 갈게요. 스쿠알로 씨.

어딜 가. 안 된다고 했잖아. 그 말을 하는 자신조차도 억지스러움이 가득 담겨있는 것을 알아차리고 미간을 찌푸린다. 가지 마. 사실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일 것이면서. 가지 말라고. 안 되는 것이 아니라, 가지 말아달라고. 일본으로 돌아간다고 해서 그렇게나 위험한 일이 있을 리가 없다는 걸 잘 알지 않는가. 그녀를 납치한 갱단은 전부 사라져버렸고, 그녀는 이제 완벽히 자유로운 하나의 사람일 뿐인데. 위험하다는 핑계로, 끝까지 너를 솔직하지 못하게 붙잡아두고.

...스쿠알로 씨는 왜 그러세요. 왜 늘 저를 이렇게 붙잡아두세요. 저한테 무슨, 일말의 감정이라도 있으신 거예요? 네 목소리는 파도와도 같이 포말로 가득 들어차 흔들린다. 마치 물 속에 빠진 사람과도 같이. 분명 화를 내고 있는데 물속에 빠져서 분노는 제게 닿지 않고. 너는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다. 아니, 그러니까. 나는 너를 행복하게 해주려고 감정의 이름을 찾아다녔던 것인데. 스쿠알로는 눈을 깜빡이다 몸을 숙여 렌호를 달래듯 어깨를 조심스레 감싼다. 아니, 그러니까.

스쿠알로 씨, 절 좋아하세요? 마치 저를 떠나보내고 싶지 않은 사람처럼 굴잖아요. 힘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이곳에서 제가 무슨 도움이 된다고 저를 이렇게까지 붙잡으세요. ? 렌호는 호소하듯 그에게 말을 늘어놓고 눈물을 한 방울씩 떨어트린다. 이제는 네게 숨길 수 없다. 더 이상 숨겼다가 결국 네게 안겨주는 것이 불행이 된다면 자신이 지금 하는 행동이 분명 타당하다 말할 수 없으리라는 걸 누가 생각해도 안다. 스쿠알로는 천천히, 입을 열어 네게 말한다.

그러니까, 너를 이렇게 붙잡아 두는 이유가 있어. 그래. 위험할 리가 없지. 그 갱단은 전부 잡아 죽였는데. 그러니까, 그러니까. 렌호. 그는 처음으로 부르고 싶던 향을 입에 담고. 내가 지금 네게 품은 감정이 있는데 이걸 무어라 부르는 게 좋을지 모르겠어. ? 그러니까, 내가 이 감정의 이름을 찾을 때까지만, 내 옆에 있어주면 안 될까. 렌호. 부탁할게. 너한테 이 감정을 온전히 고백하고 싶은데.

네 덕분에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으니까. 어깨에 아프지 않을 정도의 힘이 실렸다가 느리게 빠져나간다. 네 눈은 눈물에 젖어 붉고, 뺨으로는 모든 것이 흐른다. 너는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너는. 알겠다고 내게 자비를 베풀까. 떨어지는 눈물이 제 심장에 찌르는 감각을 느끼면서 네 입이 떨어지기를 기다린다. 너는. 그러니까.

...솔직하게 처음부터 말해줬으면 좋았잖아요. 저는, 그것도 모르고 그냥, 스쿠알로 씨를 미워했잖아요. 당신이 저를 사랑하고 있다는 감정은 알았다. 저는 당신에게 그 어떤 감정도 품고 있지 않았지만, 지금 당신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그 말들은 자신이 그런 따스한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아도 저를 행복하게 해주기에는 충분해서.

그럼 이름을 얼른 찾으셨으면 좋겠어요. 제가 그때까지는, 기다릴게요. 스쿠알로 씨가 솔직하게 말해주신 대가로. 렌호는, 제 손등으로 눈물을 조용히 닦아내리고 제 어깨위에 얹어진 스쿠알로의 손에 제 손을 얹고 잡아 내린다. 스쿠알로 씨. 그게 꼭 좋은 감정이었으면 좋겠어요. 저한테도, 스쿠알로 씨도. 전부. 그동안은 일본에 돌아가겠다고 하지 않을 테니까, 스쿠알로 씨가 얼른 말씀해주셨으면 좋겠어요. 렌호는 배시시, 평소와 같이 웃곤 방을 빠져나오고 방안에는 멍해졌지만, 제 감정이 사랑이라는 명사로 대할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을 서서히 깨닫기 시작한 스쿠알로가 우두커니 서 있다. 나는 너를 좋아하나 봐. 렌호. 그래, 이것은 사랑이라는.

렌호는 머리칼로 제 얼굴을 가린다. 붉어진 얼굴을 그가 눈치채지 못해서 다행이라고, 긴 복도를 종종걸음으로 빠르게 걷는다. 당신의 사랑고백에 무엇이 피어올랐는지, 사랑의 이름을 찾지 못한 그와 같이 저도 알지 못하고 부끄러워할 뿐이다.

감정의 이름은 사랑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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