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커미션

[렘케]겨울바다 끔찍할 정도로 사랑스러운 검은 바다다.제 발로 네가 담겨있는 장소에 발을 디딜 것이라곤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르지만, 일단 너의 체취가 조금이라도 묻어있을 장소에 스스로 걸음을 옮기는 것은 가히 잔혹한 자살행위와도 다를 바가 없었으니까. 그러나 참 어리석은 생각이지. 자신이 발자국을 남긴 장소들은 너라는 존재가 없으면 성립되지 않는 곳들이었음에. 결국 당신과 멀어진 지금, 나는 걷기 위해서는 수많은 곳에 깔린 가시밭길을 걸어야한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으니. 내 세계에 네가 손을 뻗지 않은 곳은 없는데.포말이 까만 밤하늘 아래에서도 눈부시도록 하얗게 흩어진다. 제 발치를 잡아먹을 것만 같이. 그날 너와 왔던 바다는 참 넓어보였는데. 그 어떤 것을 바다에 던져넣는다 한들 채워.. 더보기
[무쿠요우]무게 좋아해. 당신의 입에서 여태껏 나온 문장 중 가장 간단명료하면서 어떤 때보다도 제 발목을 단단하게 붙잡는 선명한 목소리다. 진한 색이 배어있는 제 눈동자는 흔들림은 없으나 묘하게 비껴난 시선을 그리며 소리 없이 굴러 당신에게서 멀어지려 잠시 애를 쓰나, 이윽고 참지 못한 채 원래 자리로 얌전하게 돌아오고야 만다. 차마 당신에게서 제 눈을 떨어트려 놓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제게 손해인 것이 분명하기에, 사랑스러운 당신을 엉망인 그릇일지라도 담지 않는다는 건 아둔한 인간조차도 행하지 않을 일.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그런 진솔한 고백에 망설임 하나 없이 대답할 수 있다는 뜻과 일맥상통하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애초에. 자신에게 있어 당신이라는 존재가 감히 닿아도 좋을 법한 동등한 위치에 있는 인간이던가... 더보기
[곡안]사과 한 조각 당장 몇 초 후에 일어날 일도 모르는 것이 인생이라 말했다. 산을 잡아먹은 불이 태어난 장소가 딱딱한 구둣발로 밟으면 일렁이지도 못하고 꺼졌을 좁쌀만한 불씨 하나였던 것처럼, 가시가 될 말들만 골라 치부를 향해 찔러 넣고, 서로의 목을 조르지 못해 안달이 난 일련의 난폭한 행위는 으레 누군가의 침묵 한 스푼이었으면 아무런 맛도 느끼지 못하고 넘어갔을지 모르는 사소한 행위에서 불발하기 마련이다. 비 온 뒤에 땅이 굳어진다고 관계라는 울타리 사이에서 어찌 망치질 한 번 하지 않고 평생을 할 수 있겠느냐마는, 날카롭다 못해 숨 막히기까지 한 지금의 분위기가 안젤라에게 거슬리지 않고 썰물 때의 고요한 바다처럼 조용히 빠져나갈 수 있을 리는 없었다. 고쿠데라와 싸웠다. 사실 불이 휩쓸고 지나가 폐허가 되어버린 회.. 더보기
[에드데이]별이 피어나는 곳에서 만나 오늘, 별이 피어나는 곳에서 만나.이는 평범함을 녹여놓은 반복적인 하루를 끝낼 수많은 행동 중 유일한 마침표로, 우리가 알고 지내온 어느 하루부터 절대 잊지 않고 행하던 당연한 의례 중 하나였다. 그렇기에 수업이 끝나자마자 책을 정리하고 있던 데이지의 손에 몇 번 반듯하게 접힌 쪽지 하나가 쥐어진 일도 그리 놀랄 만한 일은 아니었음이 분명했다. 주인을 닮아 유려한 필체로 쓰인 그 말은 단순하고 명료하나 다른 때보다 혀가 아려올 만큼 특별하다. 데이지는 마치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비밀을 삼켜버린 어린 날의 악동처럼, 책을 끌어안은 손 한 편에 쪽지를 고이 쥔 채로 학생들 틈바구니 사이를 걸음해 길고 긴 복도를 유유히 빠져나가며 기대감을 키운다. 점점이 퍼져나가는 상기된 기분의 선한 빨강은 마치 해가 지는.. 더보기
[루키히아]데이트 무엇을 입을까. 사소한 고민이 이렇게까지 길어질 수 있음은 몰랐다. 자신은 소수의 것에 깊을 정도로 신중해지고는 했다. 손으로 꼽을 수 있을 만큼 적은 것들. 그중에 하나는 루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 그것은 자연스레 당신을 만나는 것을 가볍게 여기지 않는 것으로 이어진다. 그래. 당신이 누구인데. 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 기꺼이 제게 무게를 실어줄 법한 존재가 아니던가. 히아나는 기분 좋게 여럿 늘어놓은 옷들을 둘러보며 올라간 입꼬리로 무엇이 좋을까, 다시금 고민한다.데이트를 하자 했다. 당신과는 꽤 자주 하던 습관성의 만남이다. 히아나는 흔쾌히 좋다고 수락했으며 그는 늘 그러하듯 잔잔한 웃음을 띄우고 제 머리칼을 쓸어넘겨 이마에 가벼이 입맞춤한다. 이번은 유독 특별하게 여겨졌으면 좋겠는데, 히아나... 더보기
[엔조세이시]노을 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더보기
[사스사쿠]여름의 조각들 봄이었다. 그녀는 벚꽃이 만발하여 흐트러지는 계절의 한 켠에 자리잡고 있었다. 제가 사랑하는 것과 손을 잡기 전까지 그녀는 평온하게 흘러가는 강과 같은 봄이 제게 전부로 여겨졌고 그녀의 세계에서 꽃은 저물 줄을 몰랐다. 그러다 누구에게 손이 잡혔을까. 꽃은 봄비들과 함께 처음으로 바닥에 추락하여 저물어갔으며 이끌리는 걸음을 하여 도달한 곳에는 자신이 경험해보지 못한 더운 날들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뜨겁게 공기를 달구었다. 여긴 어디야? 사쿠라는 그렇게 물었다. 여긴 어디냐고. 제 손을 잡고 있던 존재는 조곤조곤 말한다. 여기는 여름이야. 앞으로 네가 있어야 할 곳.아니, 우리가 있어야 할 곳이야. 사쿠라. 지나치지 않고 여전히 더운 여름이었다. 짤랑거리는 정겨운 풍경소리가 간간히 들리는 툇마루에서.. 더보기
[沖東]불씨 무엇이든 아무 죄 없는 사람 하나를 그냥 아이의 무지한 장난마냥 즐겁게 삼켜버리곤 하는 뜨겁고 화려한 큰 불은 아이러니하게도 사람의 쓸데없는 발길 한 번에 꺼질 조그마한 불씨에서 출발하는 법이다. 괜찮을 거라는 부주의함과 안일함을 먹이로 삼아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불은 그 누구도 다치지 않게 하고 죽는 법이, 모두들 알고 있듯 거의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따금 주의를 기울이는 데에 노력을 붓지 않고 괜찮겠거니 넘어가버리곤 하지. 그게 제 발목을 전부 태워버릴 거라는 걸 모르고서. 아니, 어쩌면 상대를 전부 태워버리는 것도 지나치고.아니다. 어쩌면 잔디 위에 떨어진 걸 보고도 부러 지나쳤을지도. 도 S 자식이 절 싫어하는 것 같아요. 왜 또. 아니 좋게좋게 대해주려고 해도 매일 틱틱대기만 하잖아요. .. 더보기
[金滅]감염 꽃으로 제대로 만족하지 못한 것 같으니 식사라도 한 끼 대접할 수 있도록 허해주는 게 어떻겠나, 계집. 꽃을 끝내 돌려보내려 하는 하나에에게 그가 제안한 말이었다. 저는 지금 연주를 눈으로 확인하고 그들을 돌보는 데에도 바빠요. 단호하게, 큰 칼은 아니었으나 날이 제대로 들어선 작은 칼로 네 말을 베어낸다. 그러나 너는 눈을 깜빡거리며 재차 웃는 것으로 반응을 보이며 하나에를 당혹하게 만든다. 연주가 끝난 후에 식사 정도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계집. 네가 이렇게까지 치를 거부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만. 나는 순수히 네 음악이 좋아 연주를 보러 온 수많은 사람들 중 하나일 뿐이야. 그저 좋은 의도로 식사 한 번 같이 하자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인가? 아니면 단순 개인적인 의도가 아니라 내가 투자하는 사.. 더보기
[金滅]전염 누군가를 마주하였을 때 그가 반드시 붙잡아야만 하는 운명이라는 것을 아는 옳은 방법은 무엇일까. 애초에 그런 이상적이고 황홀한 방법이 존재하기는 하는가. 전 인구의 반을 차지하는 리스는 운명이라는 화상자국을 남겨보지도 못하고 그저 마음에 드는 이를 만나 사랑이라는 연극을 하고 그것이 제 인생의 전부였다는 것처럼 스스로를 속이며 마지막 죽음을 맞이하고 눈을 감겠지. 그 얼마나 추하고 재미없는 인생인가. 길가메쉬는 자신이 셧으로 태어난 것에 일말의 불행조차 느껴본 적 없다. 누군가는 셧이라는 종을 영원히 짝사랑만 해야 할지도 모르는 눈 먼 이들이라 비유하지만 그건 희귀성이라고는 모르는 멍청이들이나 부러움에 발악하듯 지껄여대는 쓸데없는 말이 아니던가. 무엇이든 남들과 같은 바를 추구하고 싶지 않은 그에게 셧이..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