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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쿠요우]무게

 좋아해.

 

 당신의 입에서 여태껏 나온 문장 중 가장 간단명료하면서 어떤 때보다도 제 발목을 단단하게 붙잡는 선명한 목소리다. 진한 색이 배어있는 제 눈동자는 흔들림은 없으나 묘하게 비껴난 시선을 그리며 소리 없이 굴러 당신에게서 멀어지려 잠시 애를 쓰나, 이윽고 참지 못한 채 원래 자리로 얌전하게 돌아오고야 만다. 차마 당신에게서 제 눈을 떨어트려 놓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제게 손해인 것이 분명하기에, 사랑스러운 당신을 엉망인 그릇일지라도 담지 않는다는 건 아둔한 인간조차도 행하지 않을 일.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그런 진솔한 고백에 망설임 하나 없이 대답할 수 있다는 뜻과 일맥상통하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애초에. 자신에게 있어 당신이라는 존재가 감히 닿아도 좋을 법한 동등한 위치에 있는 인간이던가. 반사적으로 입술을 움직인 무쿠로는 이내 다시는 입을 열지 않을 것처럼 호흡을 단단히 봉한다. 당신을 사랑하는 무게가 가볍다 무겁다 따위의 질량적인 문제가 아니다. 세상 그 누구보다 제 추악한 일면을 가장 잘 알고 있을 당신이기에, 전부를 알면서도 여태껏 제 곁에서 떠날 생각을 않는 그대이기에 추락은 죽음뿐인 흔들다리를 건너듯 신중해질 수밖에 없으며, 더욱이 근본적으로 제 궁극적인 목표를 위해서 요우히라는 존재는 제게 조금이라도 가까이 있으면 안 되는 것을.

 

 무쿠로는 제게서 단 한 번도 시선을 떼지 않는 요우히의 눈과 직면한다. 서로를 향해 마주하고 있으면, 당신과 똑같은 위치에 존재하는 짙게 칠해진 푸른색 눈에 얼마 되지 않는 공통점이라며 스스로에게 이따금 묘한 안도감을 주곤 하던, 자신이 감히 잠겨버리고 싶다 생각하는 오롯한 당신의 것. 무쿠로는 흔들리던 불안감이 가라앉은 심해와 인사하자 알 수 없는 평안함으로 치환되는 간질간질한 감각을 곱씹는다.

요우히. 바싹 말라버렸으나 특유의 웃음기는 사라지지 않은 올라간 입꼬리로 무쿠로는 여전히 저만을 보고 있는 이의 이름을 부른다. 모든 것을 처음부터 끊어버리는 것이 독이 되어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누구보다 똑똑히 알고 있으면서도, 그는 망설임이 제 등 뒤로 훌쩍 다가오는 것을 굳이 막으려 하지 않는다. 조금만 생각할 시간을 가져야겠군요. 너무 오래 생각하지는 않도록 노력해보겠습니다. 자신을 거울로써 꿰뚫어보고 있는 당신이기에 확신에 가득차지도, 결과가 뻔하다는 듯 흥미가 없는 반응도 아니지만. 요우히의 표정에는 한 점의 흔들림도 없다. 알겠어. 기다리고 있을게. 그래. 저 태도는 두려움이 없는 자의 것이다.

 

 당신을 떠나보내고 홀로 남은 방에서 감도는 침묵은 되려 소음으로 다가와 저를 피곤하게 만드는데 일조한다. 긴장이 제 어깨를 타고 있던 것인지 경직되어 있던 근육이 무방비하게 허물어지는 감각과 귀로 묘하게 거슬리는 이명에 금방이라도 눈을 감아버릴 것만 같으나, 당신의 모습이 감긴 눈 사이로 파동치는 탓에 무쿠로는 다시금 정신을 차린다. 제게 있어 당신이라는 존재 앞에 선 순간부터 이리도 경솔해질 수는 없는 일이건만.

제게 무엇보다도 가까이 있던 생물이자 이해관계에 대해 많은 부가 설명을 붙이지 않아도 좋은 사람. 표면적이며 서로에게서 벗어날 수 없는 실타래와 같은 관계를 따져보자면 요우히는 제게 그런 사람이다. 서로를 반드시 이해해주기를 바라는 막무가내의 관계가 아닌, 서로의 고통을 서로에게 감내하고 있기에 너무 많은 것을 묻지 않아도 그저 고개만 끄덕이는 그런 존재. 그러나 무쿠로에게 있어 요우히는 잘 깎은 연필로 반듯한 선 긋듯 간단하게 나열하고 싶은 존재에서 그치지 않는 인물이었다. 화사한 봄날의 복사꽃마저도 쉬이 질투하리라 믿을 법한 쪽빛의 사랑을 담은 분홍색의 머리칼은 추락하여 부서진 화병의 파편이라 할지라도 망설임 없이 발을 딛고 싶을 정도로 탐하고 있었고, 저를 향해 이따금씩 무의식적으로 보이는 행동들에는 허락 없이도 입을 맞추고 싶을 정도로 못내 사랑스러워 저도 모르는 새 상대 없는 주먹을 쥐고 있을 정도로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더욱이 막 피어난 싹을 대하듯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누가 봐도 사랑스러운 것은 쉬이 바스라지곤 했으니까.

 

 당신은 참으로 묘한 존재였다. 타인에게 부러 사랑받기를 갈구하여 어떻게든 발버둥치며 애를 쓰는 사람이 아님에는 분명한데, 그 어떤 행동을 하든 입꼬리를 저절로 올라가게 만들 정도로 자신조차 모르는 간지러운 행동들을 나열하는 사람임에는 분명했으니까. 무쿠로 자신 또한 큐피트의 화살을 맞은 수많은 객체들 중 하나였겠지. 다만 자신은 그중에서도 유일하게 화살촉이 아닌 사랑의 소유자가 직접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올바른 행선지의 목표물로 선정된 것이고. 날카로운 촉에 피를 흘리는 많은 사람들 중에서 유일하게 선택된 영광에 대한 감사는 거창하지 않아도 진솔해야만 했다. 무쿠로는 요우히를 사랑스럽다고 생각하는 것을 부러 숨기지 않는다. 자신에게 거짓을 하지 않는 당신에게 응당한 대가를 지불하려면 거짓으로 응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정작 입 밖으로 소리라는 형태를 통해 내어본 적은 없는 진심. 무쿠로는 절대 공존할 수 없는 복수와 사랑 사이에서 단 한 걸음도 기울여보지 못하고 굳게 멈춰 있던 거였다. 제 삶의 유일한 이유인 복수를 굶주린 위장에 포만감 가득히 채워 넣기 위해서라면, 자칫 그 부유물들에 휩쓸려 표류될지도 모르는 당신을 제 곁에 두어선 안 되었으니까. 이는 무엇도 뚫지 못하는 방패와 무엇이든 뚫을 수 있는 창이며, 유일무이한 구원이자 절망인 셈이었다.

 

 그래서 당신을 선택해야 하는가. 누군가 질문한다면 퍽 오랜 시간이 걸릴 난제다. 자신의 복수는 순백의 캔버스와도 같다. 어둠이 드리워도 가릴 수 없고, 빛이 오면 더욱이 부각되는. 그 무엇에도 쓰러지지 않는 하얀색. 더하여 어떤 색을 마구잡이로 칠하더라도 전부 포용할 수 있는 하양. 그리고 제 분을 완벽하게 담아낼 수 있는 깨끗한 그릇. 무쿠로는 복수를 위해 지금껏 집요하게 살아남았고, 타당하게 죽지 않았다. 하루도 빠짐없이 더 쨍한 백을 위해 무쿠로는 복수에 대해 잊어버린 적이 없었으며 어떤 식으로 모두를 멸할지 깊은 밤마다 굳게 감긴 눈 사이로 학살을 시작했다. 그렇게나 집착 가득하게 잡아온 복수라는 존재의 앞에서 이렇게 망설이는 날이 오게 될 줄은 몰랐음을. 자신의 생존 이유는 오롯이 복수 하나 뿐이었으니까.

 

 그러나 이런 망설임은, 당신의 존재가 제 몇 년의 욕망을 쉬이 억누를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하기 때문이겠지. 다른 것이었다면 이런 감정이 생길 일도 없을뿐더러, 반대편에 놓인 것이 무엇이든 가볍게 잘라버리거나 벼랑으로 던져버렸을 텐데. 이게 전부 당신을 사랑하기 시작한 자신의 피할 수 없는 죗값이리라. 형량이 결단코 적지 않은 탓에, 자신은 지금 모든 것을 걸어둔 복수를 허투루 진행하지 못하고 당신이 있는 곳을 자꾸 바라보고 있는 것이라고.

 

 무쿠로는 잠시 눈을 걸어잠근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당신의 모습을 투명한 어둠 속에서 그려보기 위함이다. 당신을 그리고도 아무렇지 않다면, 그 어떤 생각도 자신을 차지하지 않는다면 망설임 없이 복수를 택할 수 있을 것이라는 나름의 방안을 세우고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검정 속에서 가장 먼저 피어오르는 것은, 당신의 지구를 담았을 짙은 파랑의 눈동자. 우리 둘에게 유일하게 남은 진솔함. 이어 가지를 뻗어나가듯 부드럽게 이어져나가는 당신의 하얀 머리칼과, 놓치고 싶지 않은 분홍빛 머리 파편. 그리고 뒤를 돌아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였을 때 지어보이는 미약한, 당신의 흔치 않은 웃음. 반대편에서 불어오는 나비의 날갯짓이 얼마나 커다란 파동을 일으키는지. 누군가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으며 경미한 무게조차 없을 그 작은 웃음이 자신은 온전히 무너뜨릴 것처럼 흔들리게 만들 듯이. 무쿠로는 헤어나지 못하는 꿈에서 질식해버리고 싶은 사람마냥 눈을 뜨지 않고 숨소리를 죽이고, 방은 허황감으로 가득 차 서서히 비틀리기 시작한다. 진실이 없어 쌓은 산은 비틀리기 마련이건만.

 

 꽤 오래된 철문이 아픈 소리를 길게 내며 꽁꽁 숨겨놓았던 것을 꺼내어 보인다. 무쿠로는 소리에 느릿하니 눈을 뜨고, 모습을 드러낸 요우히를 발견하곤 제 환상이 실체가 되어 나타난 것에 놀란 눈을 한다. 뭐하고 있는지 궁금해서. 당신은 편안하게 걸음하여 비어있는 제 옆자리에 앉고, 별다른 말은 붙이지 않는다. 마치 메두사를 보고 굳어버린 불쌍한 인간처럼, 무쿠로는 요우히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어질러진 생각을 정리한다. 제 앞에 있는 요우히라는 존재에 대해서.

 

 이렇게 다시금 당신과 마주하자, 속부터 끓어있던 욕심은 목구멍 끝까지 차오른다. 무엇이 공허한 듯, 큰 의미를 담지 않은 피사체 없는 시선과, 낮게 깔린 눈동자와, 귀로 넘긴 머리칼이 창가에 맺힌 빗방울마냥 흘러내리는 모습. 무쿠로는 불규칙해진 핏빛 심장의 원 소리를 찾기 위해 고개를 돌리지만, 이미 제 눈에 담긴 당신의 모습이 쉬이 녹아버릴 리가 없다. 제 눈에 담긴 물이 당신이라는 거대한 존재를 감히 녹여버릴 수 있을 만큼 넉넉지 못하기 때문이겠지.

 

 자신은 당신을 포기할 생각 따위 태초부터 하지 않았던 것이리라. 복수와 당신을 동일선상에 두었을 때부터 자신은 당신을 붙잡아야만 한다는 생각이 제 세상을 지배하고 있었음을 깨닫는 데까지, 호흡 한 번 정도의 짧은 순간으로. 무쿠로는 손을 뻗어, 요우히의 머리칼이 간지럼을 태우는 뺨에 정지한다. 마치 진공 상태의 공간에서 서로는 우주를 떠다니는 듯 호흡을 정지하기를. 무쿠로는 미소가 그려진 입으로 말을 꺼낸다.

 

 요우히. 당신을 이길 수가 없군요. 참아왔던 숨을 터뜨리듯, 저도 모르는 웃음과 함께 새어나가는 숨에 당신을 향한 항복을 간단히 섞는다. 제 목소리에 당신의 눈이 따라오는 기척을 확인하고 무쿠로는 오래 전부터 고민해왔던 질펀한 늪에서 벗어나 마음 먹은 바를 망설임 없이 토로한다.

 

 좋아합니다, 요우히. 당신의 감정을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이 오직 자신뿐이라면, 그것을 당신이 다시금 살아나도록 만들고 싶어한다면, 자신은 그에 대해 기꺼이 헌신하는 것이 지금까지 해왔던 모든 일 중 가장 옳은 일일 것이라고. 지금처럼, 자신의 좋아한다는 말 한 마디에 미미한 웃음을 지어보이는 당신의 표정을 보면서 자신의 선택에 한 점 후회 없으리라는 판단을 내리듯.

 

 평행한 저울에 당신의 무게를 재는 불경한 행위는 그만두도록 하자. 누가보아도 당신의 심장이 가지는 무게는 반대편에 우주를 올려놓는다 하더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존재이니.

 

 복수는 끝나지 않았다. 함께 존재하는 길이 없다면 개척하면 되는 일이다. 당신이 서 있는 길로 걸어가 백기를 들고 자신이 졌다는 것을 알리어 정중히 모시겠다, 자신이 원래 향하려던 길에 기꺼이 응해주겠냐 간절히 청하겠지.

 

 당신에게서 얻은 패배는 제 유일한 승리를 위한 불가결한 요소다. 요우히. 당신의 사랑이 고배라면 혀가 닳아도 좋을 만큼 마셔 당신에게 어울려 줄 것이다.

 

 지금은 잠시 사랑스러운 당신에게 진 것뿐이다. 자신의 승리는 아직 끝이 나지 않았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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