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거리는 얼마 정도일까. 당신과 내가 숨 쉬는 시간은 모든 것이 잠들어버린 어둑한 밤과 눈을 뜨고 잠을 몰아내려고 애쓰는 화려한 아침. 양극에 존재하고 있지 않을까. 자신이 눈을 뜨고 창 사이로 들어오는 하얀 빛을 받고 있으면, 당신은 이미 분주한 오후를 보내고 있을 것이고, 자신이 바쁘게 쌓여하는 눈 아픈 서류들을 보며 머릿속을 형식적인 일들로 가득 채우고 있으면 당신은 그득해지는 검정을 안고서 부지런한 당신답게 그날의 하루를 깔끔히 정리하고 있겠지. 공간적으로도, 시간적으로도 품에 한가득 안아도 따라잡을 수 없는 거리에서 당신은, 또 무엇을 하고 있을지 제 호기심은 쉽사리 사그라들 생각을 않는다. 당연하지. 끝이 보이지 않는 마음 깊이 좋아하는 사람을 그리는 마음은 매일 같이 심장을 두드려도 모자라지 않으니까. 오늘도 당신을 하얀 캔버스에 가득 물들이고도 허전해서 또 다른 캔버스를 찾아 헤맸어. 쿄야. 당신의 목소리가 너무 듣고 싶은 순간. 일을 마치면 당신은 이미 꿈나라에 가 있을, 너무 늦어버린 시간. 그럴 때마다 자신은 속으로 당신을 떠올리면서 간단한 메신저들을 그에게 보냈고, 때론 당신이 간단한, 그리고 의례적인 문장이 담긴 말들을 먼저 보내주며 간간히 틈날 때마다 연락을 하곤 했다. 하지만, 나는 당신의 살아있는 목소리가 제일 듣고 싶어. 매일 일을 끝마치고 쏟아지는 피로에 푸근한 침대로 몸을 묻고 있어도 풀리지 않는 당신을 향한 갈증은 당신으로만 해소할 수 있는데. 시엘은 하루종일 자유로울 수 있는 일이 없는 휴일만을 손꼽아 기다리는 것이 평일의 습관이 되어 매일 캔버스를 채워나갔다. 전부 당신의 색이야. 이러다 물감이 모자라는 건 아닐까. 당신을 향한 제 사랑이 여전한 이상, 그럴 걱정은 하지 않아도 괜찮겠지만.
너를 너무 많이 기다려서, 신이 딱하게 여긴 걸까. 아니면 자신이 당신을 보고 싶어 열심히 일한 탓일까. 산더미 같이 쌓여있던 서류를 쓰러트리자 당분간 일은 없을 것이라는 소리가 들려왔고 시엘은 원하던 대로 당신과 시간을 맞출 수 있는 휴일을 받게 되었다. 휴일이라는 소리를 들음과 동시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당신과 길고 긴, 더 이상 당신의 목소리를 잊을 것 같다는 걱정을 하지 않아도 좋을 만큼 이야기를 나누는 것. 기쁜 마음을 담아 집에 돌아온 날, 그에게 내일은 드디어 기다리던 휴일이라는 메신저를 하나 남겨놓았고, 시엘은 꿈에서 깨어 눈을 뜨자마자 시계를 확인했다. 11시. 당신은 이제 막, 잠겨드는 밤에 발걸음을 들였을 시간. 시엘은 올라가는 입꼬리를 어찌하지 못하고 그토록 누르고 싶었던 번호를 천천히 누르기 시작한다. 보고 싶은 쿄야. 통화 버튼을 누르고 진행되는 통화음은 그리 오래 가지 않고 당신의 짤막한 목소리가 분명하게 들려온다. 여보세요. 시엘. 건조하고 덤덤하지만, 어딘가 제 이름을 부르는 순간에 가벼운 웃음기가 실려 있는 묘한 목소리. 잘 잤어? 아직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으나 당신에게서 들려오는 말들이 너무 달콤해서 시엘은 웃음밖에 지어지질 않는다. 응, 쿄야. 쿄야는, 좋은 저녁이야? 아직은 잠이 온전히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시엘은 침대를 잠시 굴렀다가 묻는다. 나쁘지 않아. 당신다운 대답이 돌아오고, 둘은 가벼운 대화들을 이어나간다. 어쩌면 특별하지 않은, 너무나도 평범한 대화임에도 그것이 어찌 그리도 좋은지. 지워지지 않는 웃음 속에서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가고, 더 이상 무슨 이야기를 꺼내야 좋을지 고민하는 순간까지 전화는 끝이 나질 않는다. 너무 좋아. 쿄야. 당신의 밤을 내가 너무 괴롭히는 게 아닐지, 고민되지만.
일은 힘들지 않고? 조금. 근데 할 만 해. 쿄야랑 통화하기 힘든 게 좀 싫지만. 보고 싶어. 시엘. 응? 보고 싶어. 당신은 마치, 갑작스럽게 생각난 것을 잊어버리기 전에 고한다는 듯, 어느 때보다도 조용하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제게 그리 말했다. 보고 싶다고. 이렇게 갑자기 고백하는 게 어디 있어. 쿄야. 시엘은 그 한 마디에 놀라 침대에서 벌떡 일어난다. 보고 싶다고 했어. 시엘은 침대에서 내려와 전화를 끊지 않은 채로 캐리어를 꺼내어 짐을 챙기기 시작한다. 알았어, 쿄야. 이따 봐! 곧 연락 다시 할게! 응? 이내 전화는 신호음으로 끊어지고 히바리는 귀에서 울리는 소리에 이게 무슨 일인가 눈을 잠시 깜빡인다.
이게 무슨 일이람. 오랜만에 목소리를 듣고 있었는데. 히바리는 혹여나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닌지 걱정한다. 아니면, 제가 잘못된 말을 했나. 보고 싶다는 말을 하기 전까지는 다른 낌새도 보이질 않았는데. 결국 아무 신호도 돌아오지 않는 휴대폰을 내려두고 히바리는 짧은 한숨을 쉰다. 보고 싶다. 그것은 분명 틀리지 않은 진심이라. 당신과 나누는 이 길지 않은 대화 속에서도 당신이 계속 떠올라 조금 버거웠는데. 갑작스럽게 당신은 무슨 일로 저와의 대화까지 중단하고. 이따 보자는 건, 이따 다시 통화하겠다는 이야기인가? 히바리는 복잡한 머리를 정리하지 못하고 가볍게 침대에 걸터앉는다.
당신이 떠난 지 꽤 시간이 흘렀다. 실질적으로 보면, 달력 하나 넘기지 않은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마치 몇 년이나 보지 못한 사람처럼 끝이 보이지 않는 그리움만을 남기고 제게 남아있었고, 당신의 모든 것에 욕심을 부리고 싶어지는 그런 때가 도한 거였다. 금욕적인 제게 유일한 욕심은 당신. 히바리는 잠시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 당신이 담겨있는 사진을 보며 심심찮은 위로를 건넨다. 보고 싶어. 이 말이 얼마나 하고 싶었고, 얼마나 실현시키고 싶은지. 너는 더할지도 모르겠다. 제 것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그래서 너는 지금 무얼 하고 있는지. 어둑한 밤 속에서 히바리는 이내 제 손에서 작게 울리는 진동에 시선을 느릿하게 옮긴다. 당신에게서 온 메신저. 어쩌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갑작스러운 비행기 표 하나와 같이 나온 당신의 손. 그 후에 따라온 단문. 나 지금 가! 금방 갈게! 어째서 단순한 텍스트에서조차 당신의 밝은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은지. 응. 보고 싶어. 히바리는 그렇게 짧게 답을 보낸다. 나머지 이야기는, 당신이 오고 나서 전해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보고 싶어. 시엘. 사랑한다는 말은 당신이 도래하고 나서, 해야만 하는 최후의 인사. 당신이 얼른 도착하기만을 기다리자고. 히바리는 달아나버린 잠을 부러 잡으려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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