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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퀘박스

[무쿠모모]교살(絞殺) 인간은 정말 싫다. 하늘색 머리칼이 바다의 물결을 따라 잔잔하게 흔들린다. 마치 고요한 태곳적의 모습을 경외하여 모방하고자 하는 듯, 죽어있는 소리들은 더없이 평화로운 파도와 포말들은 수면 위로 제 모습을 드러내려 황급히 헤매었고 제 뺨을 간지러이 훑고 지나가려 하는 물고기들은 무엇이 그리도 기쁜지 방긋방긋 웃으며 오색빛깔을 찬란하게 비추고선 스쳐지나갈 뿐이었다. 그들이 사랑하는 자신이 비록 죽어가는 인간의 목을 힘껏 조르고 있다 하더라도, 영원히 나를 품어줄 파란 바다에서 피를 흘리는 증오를 교살한다 하더라도 그들은 결국 나를 안아줄 것이니. 인간의 몸뚱아리는 갑작스레 심해 한가운데로 추락하여 제 눈앞으로 침식했다. 빛이 바다를 탐닉하여 포근한 기운을 넘실거리게 하는 온화한 날씨였고 자신을 동경하는 아.. 더보기
[길가하나]석류 한 알 석류 한 알의 무게를 알고 있나요. 당신의 눈은 선명한 피를 닮아 숨길 수 없는 붉은 색이다. 탁한 어둠 하나 섞이지 않고 빛 아래에서 더욱 영롱하게 맑은, 그 누구든 한 번쯤 마주하면 당연히 매혹당해 시선을 돌리지 못할 눈. 하나는 그의 외모에 있어서는 한 번 부정이라는 것을 해 본 적이 없긴 하나, 길가메쉬의 눈을 묘사하는 데에 있어서는 특히나 공을 들일 만큼 그 빨간 눈을 마음에 들어 했다. 사람들을 홀리게 하는 그 눈이 잘못한 거라고. 어떻게 보면 매우 글렀다 할 수 있는, 묘한 화법을 속으로 중얼거리며 하나는 제 앞에서 신화를 기록해놓은 책을 읽고 있는 길가메쉬를 바라본다. 하데스와 페르세포네의 이야기를 아느냐. 당신을 두고 떠난 인리수복동안, 당신은 또 어떤 새롭고 흥미로운 지식을 탐하였기에... 더보기
[사스사쿠]벚꽃 살을 베어낼 것 같던 강인한 겨울이 무색하게 분홍빛 벚꽃이 수줍은 듯 뺨을 붉히는 봄날은 당연하다는 듯 돌아온다. 사쿠라의 계절. 얼어붙은 몸을 꽁꽁 감싸며 경직된 얼굴을 하고 있던 사람들이 하나같이 봄날의 온기에 느리게 녹아내리며 웃음을 자아내는 사랑스러움이 넘치는 계절. 온화하고 따스하여 겨울에게서 도망친 생명들까지도 고개를 들게 만드는 봄을 싫어하는 사람은 좀체 눈 씻고 찾아보아도 한 번 발견해본 적 없으며, 그것은 까만 겨울을 닮은 것 같은 깨진 거울 조각의 쨍한 여름 남자에게도 해당되는 신기한 이야기 중 하나였다. 어떠한 계절에 속하고 싶어하는 데에 무슨 자격이 필요하기나 하겠느냐만, 그 차분한 남자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이 계절의 소속감 따위를 논하는 시시하고도 지루한 문장에서의 특이점을 쉬이.. 더보기
[길가하나]진실 혹은 대담 우리 게임 하나 할래요?벼랑 끝에 몰린 것보다 더 위태로운 발언이다. 게임으로 칭해지는 모든 것에서 당신을 이길 수 있으리라는 섣부른 판단 따위는 상상으로도 삼아서는 안 되는 금기일지 언데. 그러니 먼저 당신에게 승패를 결정하는 것 따위의 일을 제안하는 것은 스스로 불에 뛰어드는 나방과도 같은 멍청한 일이라 말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당신이 다소 같잖다는 미소를 지으며 내려오는 시선으로 저를 바라보는 데에는 타당한 명분이 존재하는 것. 또 무엇을 준비했기에 이리도 기고만장하게 저를 약 올리느냐는, 그런 감정이 녹아들어 있는 당신의 표정에 자신은 회피 하나 없이 진한 피와 같은 당신의 눈을 직면하여 웃는다. 어차피 자신은 지금 기를 바락바락 쓰며 당신을 이기기 위해 판을 던져놓은 것이 아니기에. .. 더보기
[길가하나]선망 당신은 날 분명 원하게 될 것이라고.실로 오만한 소리다. 당신이 아니라 그 어떤 타인에게 이야기했어도 코웃음을 치며 시큰둥하니 미친 사람 취급했을 법한 문장이라고. 하나는 무력하게 일렁이는 찻잔의 수면을 반쯤 내리깐 시선으로 응시하며 덤덤한 생각을 각설탕 대신 녹여낸다. 다들 이 말을 들으면 자신과 다시는 상종해주지 않을지도 모르는, 상당히 도발적이고 건방진 거의 강요형의 답이건만, 어쩌면 당신은 그에 더하여 한 번은 넘어가주겠다는 웃음을 내비쳐 보일지는 모르는 일이겠다. 참으로 짓궂게도, 하나는 아무 죄가 없는 홍차를 티스푼으로 가벼우나 전부 일그러지도록 휘휘 저어 물결을 잔뜩 구겨버리고, 다시금 느릿하게 제 본래 모습을 찾아가려 애쓰는 불행한 표면 위로 제 조각난 모습을 똑바로 마주하여 이번에는 또 .. 더보기
[무쿠요우]첫키스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공간과 시간에서 한 치도 틀리지 않은, 똑같은 경험을 선물한다 하더라도 지불하게 되는 개개인의 감정은 전부 다를 것이라는 사실은 꽤나 유명하다 할 수 있을 만인의 진리라 생각한다. 누군가의 죽음을 어떤 이는 피할 수 없는 숙명이라 여겨 그저 예의 바른 목례로 그가 가는 길을 심심찮게 위로해 줄 수도 있으나, 누군가는 이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눈물을 하염없이 쏟아내며 펑펑 스러질 듯 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인간은 다들 약한 존재에 불과할 뿐이면서, 그 어떤 이들도 하나 같지 않고 다른 모습으로 스스로를 조각해내는 생물이라 신비롭다는 형용사를 한 번 붙여보고 싶을 만큼 예상하기 어렵다. 요우히는, 이 모든 의문들을 제 연인인 무쿠로로부터 떠올리게 되었다는 것이 새삼 이상하다고 생.. 더보기
[히바시엘]취기 그러니까 적당한 것은 무엇이든 나쁘지 않다고. 이는 그것이 어떠한 행위를 목적으로 삼든 적용되는 만국 공통어와 같은 명언이 아니었던가. 누군가는 몸에 좋지 않다며 손끝에도, 입술에도 일절 닿지 못하게 하는 담배나 술 같은 일종의 기호성 식품도, 적당하면 나쁠 것 없다는 말을 피해갈 수는 없는 것들인지라. 설령 인간의 몸에 해악을 끼친다 하더라도 어차피 한줌 흙으로 돌아갈 인생, 술 한 잔에 바로 죽을 정도로 약하게 설계되지는 않았다. 그리고 고단한 일 끝에 마시는 한 잔의 알싸한 술이 지친 몸의 어떤 감각을 일깨워주는지는 시엘 또한 모르지 않았기에 선명하게 투영되는 매끄러운 유리잔에 붉은 빛의 와인을 채우기를 여러 번. 하얗던 얼굴은 봄날에 점점이 꽃이 피어오르듯 분홍빛 기운으로 따스히 차올랐고 또렷하고.. 더보기
[길가하나]사랑의 범주 세상에는 무수한 형태의 사랑이 있다고, 이미 한 번 사랑을 뼈저리게 경험하지 않은 이라 할지라도 당연한 사실이기에 사랑이라는 것에 대한 개념을 각인시키기 시작한 사람이라면 모두들 아무렇지 않게 제 의식 속에 새기고 있는 이야기일 것이다. 사실 너무 뻔한 이야기라 굳이 이리 말을 하는 것 자체가 말의 소모적인 부분으로 느껴지리만큼, 물론 그 사랑의 종류를 전부 손에 꼽을 수 있을 만큼 선하게 꿰뚫고 있는 사람은 찾기 힘들 것이고, 그중에 가짜 사랑도 포함되어 있을지 모른다는 잠재적인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 사람은 더더욱 없을 것이라고.사랑이 가짜인 순간부터 그걸 사랑이라는 명칭에 들이도록 허락할 수는 없지. 언어의 소통에 있어 이런 논점을 토로하기를 거리껴 하지 않는 사람이라 할지라면 분명히, 군중들 중 한.. 더보기
[길가하나]선물 무엇을 선물로 받고 싶느냐고 당신은 물었다. 언제나 그러하듯 여유롭고 느긋한 표정으로 저를 관전하는 바랜 스크린이 흐르는 극장의 객처럼. 그 드넓은 관에서 감정을 건조하게 표현하는 배우를 홀로 차지한 당신은 그런 태도가 당연한 사람이겠지. 손에 가지지 못한 것이 세상에 실존하지 않는 당신은 자신이 가지고 싶어하는 물건이 무엇이든 안겨줄 수 있는 어린 날의 산타클로스보다 더 현실적이고 완벽한 존재이니, 지금 당장 자신이 지구 반대편에서만 볼 수 있는 어떠한 물건을 아무 이유 없이 입에 되내어도 당신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제 눈 앞에 실재를 보이며 또 오만한 왕이 되어 한껏 거드름을 피울 게 눈에 선했으니까. 그래서 당신은, 영화의 결말을 알아요? 조그마한 목소리로 능숙하게 대사를 읊조리는, 읽을 수 없는 표.. 더보기
[히바시엘]보고 싶어 우리의 거리는 얼마 정도일까. 당신과 내가 숨 쉬는 시간은 모든 것이 잠들어버린 어둑한 밤과 눈을 뜨고 잠을 몰아내려고 애쓰는 화려한 아침. 양극에 존재하고 있지 않을까. 자신이 눈을 뜨고 창 사이로 들어오는 하얀 빛을 받고 있으면, 당신은 이미 분주한 오후를 보내고 있을 것이고, 자신이 바쁘게 쌓여하는 눈 아픈 서류들을 보며 머릿속을 형식적인 일들로 가득 채우고 있으면 당신은 그득해지는 검정을 안고서 부지런한 당신답게 그날의 하루를 깔끔히 정리하고 있겠지. 공간적으로도, 시간적으로도 품에 한가득 안아도 따라잡을 수 없는 거리에서 당신은, 또 무엇을 하고 있을지 제 호기심은 쉽사리 사그라들 생각을 않는다. 당연하지. 끝이 보이지 않는 마음 깊이 좋아하는 사람을 그리는 마음은 매일 같이 심장을 두드려도 모..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