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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퀘박스

[길가하나]진실 혹은 대담

우리 게임 하나 할래요?

벼랑 끝에 몰린 것보다 더 위태로운 발언이다. 게임으로 칭해지는 모든 것에서 당신을 이길 수 있으리라는 섣부른 판단 따위는 상상으로도 삼아서는 안 되는 금기일지 언데. 그러니 먼저 당신에게 승패를 결정하는 것 따위의 일을 제안하는 것은 스스로 불에 뛰어드는 나방과도 같은 멍청한 일이라 말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당신이 다소 같잖다는 미소를 지으며 내려오는 시선으로 저를 바라보는 데에는 타당한 명분이 존재하는 것. 또 무엇을 준비했기에 이리도 기고만장하게 저를 약 올리느냐는, 그런 감정이 녹아들어 있는 당신의 표정에 자신은 회피 하나 없이 진한 피와 같은 당신의 눈을 직면하여 웃는다. 어차피 자신은 지금 기를 바락바락 쓰며 당신을 이기기 위해 판을 던져놓은 것이 아니기에. 하나는 준비한 술병을 손에 쥐어 곱게 정돈된 테이블 위에 깔끔하게 떨어지는 소리로 내려놓는다.

진실 혹은 대담. 알아요? 깔끔한 스티커가 포인트인 술병이 등장하자 이게 무엇이냐는 듯 물어보는 당신의 눈에 하나는 한 가지 물음표를 던지며 병의 굴곡을 따라 손을 느리게 쓸어내린다. 내가 당신한테 질문을 던지면, 그에 마땅히 상응하는 진실을 내어놓거나 그러기 싫다면 내가 시키는 일을 해야만 하는 거. 우리 겨우 둘이니까 술은 그저 마시는 용도로만 쓰자고요. 하나는 성난 고양이를 살살 건드리는 도발적인 미소를 지으며 짧은 설명을 끝낸다. 모르면 어쩔 수 없고요. 원래 게임은 하면서 배우는 거잖아요? 어쩌면 당신을 무시하는 것이 전제조건으로 나타나 있을지도 모르는 제 당당한 말투에, 길가메쉬는 하, 짧은 한숨과도 같은 날카로운 조각을 내뱉으며 웃는다. 오늘도 여전히 건방지군, 계집. 한 번 날뛰어 보거라. 네가 무엇을 내놓든 가려진 외피를 전부 벗기어 수치라는 걸 느끼게 해 줄 테니. 당신의 팔짱은 시선 하나 들어갈 틈도 내어주지 않은 채 단단히 매여있고, 그에 따른 긴장감은 공기의 허리를 단단히 죄어 호흡마저도 가냘프게 흔들리도록 한다. 당신에게는 인간의 치부라 할 수도 있는 모순덩어리의 비밀이라는 게 존재하기는 할지.

가벼운 걸로 시작할까요. 자기가 잘나지 않은 사람이라고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 있어요? 단순한 호기심과 당신의 뻔뻔스러움을 한 번쯤은 찔러보고 싶었던 마음에서 기인한 다소 우스꽝스러운 질문. 조명을 받아 은은하게 빛이 나는 술잔에는 당신이 감히 오줌과도 같다고는 표현하지는 않을 술이 안전한 선까지 부어진다. 그런 걸 질문이라고 하는 게냐, 계집. 머리를 좀 더 잘 써 볼 것이지. 여전히 당신의 손은 조금이라도 움직일 기미 없이 그대로고, 대답은 딱 떨어지는 잘 마른 나뭇가지처럼 숨김 하나 없이 제 귀로 전해진다. 그럴 리가. 네가 옆에서 봤다면 이 몸이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지 실감했을 텐데. 계집, 너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미련한 인간이었나?

그런 건 아니지만, 잘난 당신께서 아직 게임에 대해 이해를 못하셨을까 이 미천한 사람이 우려가 되어서요. 하나는 그를 골탕 먹이기로 작정한 것처럼, 길가메쉬의 심기를 거스를 만한 말들만 골라 문장 위에 장식하여 자신에게 주었던 모욕감의 보답으로 바친다. 그 이상으로 말을 꺼내는 것을 멈춘 당신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을 좁혀진 미간으로 설명하고, 하나는 그 모습을 보며 참, 저 얼굴 하나는 이기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 당신의 유일한 지점이라는 생각을 한다. 성격까지 좋았다면 얼마나 완벽해. 물론 그랬다면 아마 지구가 멸망했을지도 모르지만. 농을 그만두고 솔직하게 말하자면, 오만한 당신마저도 당신이라는 사실에 마음에 드는 것이니.

계집, 너는 왜 이런 게임을 하자는 것이냐. 당신의 질문은 흥미롭지도, 아슬아슬하지도 않은 시시한 맹물의 맛. 나한테서 알고 싶은 비밀이 고작 그것밖에 없어요? 술잔은 여전히 한 방울도 사라지지 않은 채 침묵을 유지하고 있고, 하나는 무의식적으로 술병의 마개를 매만지며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 그 질문에 지루하게 답한다. 얻어내고 싶은 게 있으니까, 감히 이기지도 못할 수가 훤히 보이는데도 게임을 하자고 한 거 아니겠어요? 아실 만한 분이 왜 이러실까. 세상의 모든 것이 당신의 것이기에 제 호기심마저도 당신의 것이 되어야만 하는 것처럼. 아니면, 그냥 우리 이런 시시한 게임 따위는 금방이라도 집어치우고 단도직입적으로 나갈까요? 말하지는 않았지만, 하나는 속으로 그에게 넌지시 제안하며 질문을 하라는 듯 그의 눈을 오롯이 제 눈에 담는다. 내 차례네요. 호기롭게 시작한 게임이 벌써 지루해 지리라곤. 자신이 이렇게 싫증을 잘 내었던가, 아니면 그저 이 모든 것은 당신 때문에 불발한 간드러진 상황일지. 이 게임의 원흉이자 부질없는 짓들의 시작.

좋아하는 사람, 있어요?

당신의 대답은 딱 하나였다. 계집, 넌 참 뱀과도 같군. 술잔은 역설적이게도 한 방울도 남지 않은 빈 잔으로 다시 태어나고, 당신은 술맛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표정을 구긴다. 간사한 꼴이? 아니면 무엇이? 하나는 원하는 대답을 얻을 수 없으리라는 판단 아래 게임을 그만하자 말했고, 길가메쉬는 쓸데없는 것에 힘을 빼게 한 저를 질책하며 기분 나쁜 맛의 술을 해소할 때까지 자신을 찾지 말라 통보했다. 당신이 괜찮아질 지점을 자신이 어떻게 알 거라고 저런 무책임한 말을.

그런데 어째서 당신은 인간과도 같은 비밀을 만들어요? 나는 당신이 그 술에 입을 대는 일은 죽어도 생기지 않을 것이라 맹신했는데. 홀로 남은 테이블에 턱을 괴고서, 한참이나 남아버린 술병에 의미 없는 시선을 두고 간에 기별도 안 간 당신의 이야기에 작게 한숨을 내쉰다.

그렇지만 어차피 그 답은 나일 거잖아요. 당신에게 처음으로 허망함이라는 감정을 안겨준 가증스러운 뱀처럼, 어쩌면 간사하게 느껴질 웃음으로 하나는 웃고 당신이 언제쯤 진솔하게 모든 것을 토로해놓을지 가학적이고도 즐거운 상상으로 잠시 눈을 감는다.

진실 혹은 대담. 무엇이 더 마음에 들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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